프란츠 카프카와의 <변신>에 대한 가상인터뷰
이 글은 제가 <변신>을 읽고 느낀 나름의 해석을 원작자인 카프카와 만나서 인터뷰를 하면서 풀어간다는 설정으로 쓴 "가상의" 글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객관적인 사실들 - 카프카의 성장과정 등등 은 백과사전의 정보이지만 그외의 <변신>에 대한 카프카의 설명은 순전히 제 생각이오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
마크 :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변신>의 원작자 카프카씨를 모시고 <변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카프카작가님, 먼저 소설 <변신>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카프카 : 안녕하세요, <변신>은 제가 스물아홉살 때 쓴 소설입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장편소설을 쓸만큼 저의 환경이 여유롭지가 못했어요. 낮에는 보험회사에서 일을 해야 했고 주로 늦은 밤에 저의 방에서 글을 썼습니다. <변신>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외면당하고 소외된 모든 인간들의 자화상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젊은 시절도 무척 우울했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늘 환영받지 못했던 존재였죠. 몸은 허약했고 사교성도 없어서 회사생활이나 가정생활 무엇하나 즐거운 것이 없었습니다. 문득 ‘벌레와 다를 것 없이 무기력한’ 저의 모습을 상상하고 이 상황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마크 : 아, 그러셨군요. 제가 알기로는 카프카씨의 집안은 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나름 자수성가하셔서 넉넉한 형편이었다고 들었는데, 가족생활에서의 불만은 어떠한 연유에서였는가요?
카프카 : 저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지만 유대인입니다.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었고 저는 독일어를 쓰는 유대가정에서 태어났기에 독일인으로 분류되죠. 국가도, 출생성분도 정체성이 모호한 상황이었고 저희 아버지는 상인으로 늘 바빴고 어머니도 아버지의 일을 도와야 했기 때문에 전 어릴적부터 남의 손에 맡겨져 자라났습니다. 게다가 저의 동생들- 남동생 두명과 여동생 세명을 모두 질병과 세계대전으로 잃게 되었어요. 아버지는 독선적이고 폭력적인 분이었고, 많은 자녀들 가운데 홀로 남겨진 저는 아버지에게 반항할 수도 없었어요.
마크 : 이런,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렇다면 <변신>에서의 그레고르와 아버지의 모습에는 카프카씨와 부친의 관계가 투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요?
카프카 :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하지만 제가 글을 쓸 때 특정한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한다기 보다는 그 사람의 캐릭터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중의 하나로 녹아들어간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저의 아버지였다면 그레고르는 아마 발견된 그날 즉시 내쫓겼을테니까요. (웃음)
마크 :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변신>의 장면들에 대해 질문을 드려보죠. 대체 그레고르는 왜 갑자기 벌레로 변한건가요? 그리고 하필이면 벌레, 그것도 다리가 많고 등껍질이 단단한 벌레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카프카 : ‘벌레’에 대해 제가 쓴 독일어 원문은 ‘Ungeziefer’입니다. ‘벌레’보다는 ‘해충’에 더 가까운 뉘앙스의 말이죠. 영어로 치자면 insect(곤충) 이나 bug(벌레) 보다는 vermin(해충)에 가까운 뜻입니다. 벌레중에는 귀여운 벌레도 있잖아요? 그런 이미지를 없애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회복불가능한 혐오의 상태’를 표현하자니 고른 단어입니다. 바퀴벌레를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바퀴벌레는 보기에도 징그럽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죠. 잘 죽지도 않아요. 하지만 딱히 사람을 문다거나 독을 퍼뜨린다거나 날아다니며 위협한다거나 하지도 않죠. 어찌보면 바퀴벌레는 그 진득한 항상성과 무기력함 때문에 더욱 혐오를 받는 것 같아요. 눈에 띈 바퀴벌레는 어린아이도, 여자들도 징그러워하면서도 반드시 죽이고 말죠. (웃음)
인간들이 다른 인간에게 느끼는 혐오나 증오도 바퀴벌레에 대해서 느끼는 그것과 본질적으로는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려면 본인이 직접 벌레가 되어보는 수 밖에는 없죠. 변신의 이유는 너무도 다양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서 팔과 다리를 잃을 수도 있죠. 질병에 걸려서 꼼짝 못하고 누워만 있을수도 있어요. 또는 직장을 잃거나 사업이 망해서 경제적인 불구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떠한 이유에건 그 결과는 그들은 모두 스스로가 벌레가 된 기분을 느끼게 된다는 거에요. 그 중 하나 둘을 예시로 들자니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아예 과정과 이유를 생략하고 변신이 시작된 시점부터 쓰기로 한겁니다.
마크 : 말씀대로라면 모든 사람이 벌레가 될 수 있고, 일단 벌레처럼 된 인간은 그레고르처럼 회복을 못하고 끝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를테면 가족의 극진한 도움과 보호로 재기에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나 과거의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의 인간승리도 많이 알려져 있으니 말이죠.
카프카 : 네. 물론 결과적으로 그런 해피엔딩도 가능하겠죠. 저는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예외적이고 소수인 삶의 역경’을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존재의 본질과 그 가치가 의외로 쉽게 훼손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 본질의 나약함을 인식하게 되면 절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마크 : 인간 본질의 가치가 훼손되는 건 정확히 어떤 경우를 말하는 건가요?
카프카 : 그레고르는 팔팔한 청년입니다. 그가 벌레로 변해서 잃은 것을 보자면 신체적으로는 외양의 변화겠지만 그것은 다소 상징적인 이미지일 뿐입니다. 그가 벌레가 된 직후에 가장 맘에 걸려하는 것이 바로 직장에 출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걱정이었죠. 그레고르가 생각하기엔 자신의 가장 본질적이고 큰 책임이자 존재의 가치는 바로 가족의 생계를 맡아오던 경제적 능력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족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죠. 내용의 전개를 보시면 그레고르가 경제적 무능력에 빠져 있는 시간동안 다른 가족들은 차츰 자신들의 경제적 역할을 찾아 나섭니다. 아버지는 은행경비로, 어머니와 동생은 알바를 하면서 그레고르가 남겨준 경제적 어려움을 만회하려 하죠. 그에 비례하여 가족들의 생각과 태도도 차츰 변하기 시작합니다. 경제력이 없는 그레고르에 대해 차츰 힘을 행사하게 되는 거죠. 위치가 역전되었다고나 할까요. 힘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그레고르에게 사과를 던지는 것 같은 물리적인 힘도 있지만 누이동생이 그레고르의 가구를 들어 옮기려는 것 같은 ‘존재에 대한 추상적인 압력’도 포함됩니다. 그레고르는 아쉽게도 이것을 잘 알지 못하죠. 모든 것의 원인제공자가 자신이라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이 모든 힘들의 행사를 어리둥절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거죠.
마크 : 아, 말씀 중에 궁금하던 것이 나왔네요. 아버지는 대체 왜 사과를 던진거죠? 단순히 화가 나서 폭력을 쓰는 것이라면 왜 ‘사과’였는지에 대해서 무척 궁금합니다.
카프카 : 사과로 맞아 본 적 있으세요? (웃음) 사과를 특별히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쓴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음식물’을 던져서 폭력을 가하고 이것이 결국 그레고르의 죽음의 원인이 된다는 설정은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음식’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나에게 잘못을 하거나 꼴보기 싫은 사람이 내 앞에 있다고 해도 웬만하면 테이블 위에 있는 사과바구니에서 사과를 집어서 던지진 않아요.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를!! 계속 맞출때까지 말이죠. 음식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가장 큰 혐오의 표시라고 생각했어요. 마침 그레고르는 등껍질이 있는 벌레였고 사과는 던지기에도 좋고 딱딱하기 까지 하니까 등껍질에 깊이 박혀 상처를 썩혀 죽게 만들기에 딱이었죠. 아버지가 은행경비 제복을 입고 사과를 던지는 장면 – 이것은 경제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한 사람이 상대에게 가하는 혐오의 이미지로 아주 적합했어요.
마크 : 그런 거였군요. 그렇다면 카프카씨는 <변신>을 통해서 결국 자본주의에서 경제력에 인간본질이 무시되는 폐해에 대해 지적하고 싶었던 것인가요? 그런 주제라면 굳이 벌레로까지 변신을 하지 않아도 비슷한 주제를 가진 다른 소설들처럼 쓸수도 있었을텐데요. 아서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처럼 말이죠.
카프카 : 그래요. 저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려는 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주의’ 이전부터 있었던 인간의 본질이란 것이 실상은 이처럼 별볼일 없이 나약하고 허물어지기 쉽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더불어 인간의 본질과 가장 가까운 단짝처럼 여겨지던 가족의 사랑이란 것도 사실은 모래위의 집처럼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도 함께 말이에요. 아,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레고르의 가족들을 비난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가족구성원들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그레고르 같은 상대의 본질을 훼손하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여기엔 어떤 선악이나 잘잘못의 기준은 없어요. 누구도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나쁜짓을 하지 않았고, 그런 가운데에서 인간 본질이 훼손되어 가는 것이죠.
마크 :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쭐게요. 마지막 장면에서 가족들이 나들이를 나가며 각자 새로운 희망에 젖으며 미래를 기대하는데, 이런 결말을 통해 뭘 전달하고 싶었던 건가요?
카프카 : 글쎄요.. 만약 그렇지 않고 가족들이 그레고르의 시체를 끌어안고 슬픔의 눈물을 흘렸거나 후회를 했다면 이 소설의 메시지와 어울리지 않았겠죠. 그레고르라는 인간이 본질을 잃고 죽음에 따라서 남은 가족들의 인간적 본질은 침해에서 구제되고 생명력을 회복하게 된거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과 삶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고 비난받을 일이 아니에요.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죠. 하지만 그밖의 사람들은 다들 별 일 없이 살아나갑니다. 마치 강물의 물결과도 같아요. 남은 자들은 그들의 인간본질을 지키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긍정적인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그런 모습을 담고 싶었습니다.
마크 : 네. 자세한 설명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변신>을 좀 더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카프카씨, 당신은 현대의 인간소외와 부조리를 천재적으로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위대한 작가입니다. 그 명성에 걸맞게 당신의 작품은 무척 해석하기 까다롭고 난해하다는 의견도 많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당신의 또다른 작품인 <성> 이나 <소송> 에 대해서도 해설을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프카 : 과찬의 말씀입니다. 저는 친구에게 저의 원고를 모두 불태우라고 부탁했지만 친구가 저와의 약속을 어기고 원고를 출판해 버려서 이렇게 제가 알려지게 되었죠. 아쉬운 일입니다. 저의 장편소설은 완성되지 못했어요. 미완성된 글을 작품이라고 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원하신다면 기억을 되살려 다음에 한번 더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마크 : 오늘 정말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카프카씨.
카프카 : 저도 즐거웠어요. 그럼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