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포, 해학, 그리고 우정.... 혼란한 세상속 인간의 준비물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에 대한 감상문입니다.
위대한 시인 네루다는 그의 시에서 "시가 나를 찾아왔다"고 말한다.
자, 시를 한번 써 볼까... 나를 찾아올 분 같진 않지만...
<키워드1. #우정>
우정
우정은 삶이라는 가루에 사랑이라는 액체를 섞어서
잘 섞은 후 길게 늘어뜨려 펼쳐놓은 밀가루 반죽.
그 반죽을 뚝뚝 떼어서 수제비를 만들어 먹어.
어떤 때는 칼국수도.
찬장에 둔 밀가루는 유통기한이 늘 지나버리지만
그래도 찬장에 밀가루가 없으면 무언가 허전해서
유통기한이 지난 밀가루를 쉽게 버리지 못하게 돼.
가끔은 수제비나 칼국수가 너무 먹고플 때가 있거든
가끔은, 오래된 그 친구가 너무 생각날때가 있거든
칠레.
길쭉한 나라 모양에 축구 잘하는 나라 정도의 배경지식 밖에는 없었으나
그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바닷가 마을 이슬라 네그라를 배경으로
해학과 역사와 문학과 사람들의 삶과...
그리고 "우정"이 담긴 책이었다.
마리오와 네루다의 우정
작가인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네루다에게 표현하는 헌사와 동경의 우정
빈곤과 군사 쿠테타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민중들의 우정
이 책의 키워드는 그래서 '메타포'가 아니라 '우정'인듯 싶다.
이들의 우정은 동경에서 시작한다.
마리오는 네루다를 동경했다.
마치 소년이 소녀를 동경하듯
실향민이 고향을 동경하듯
철학자가 절대자를 동경하듯
이처럼 사랑은 정보와 논리에 기인하지 않고
때론 막연하게 때론 무모하게 솟아나는 것이리라.
'청년은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몇 달 동안 공허하기만 하던 풍경이 꽉 찼음을 느꼈다.'
우정으로부터 나오는 교감에 감동한 마리오의 느낌을 잘 나타내 주는 구절이다.
마치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을 성공하여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벅참을 느끼듯이
동경하는 대상과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서 ‘존재의 의미’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감동적인 이벤트인 것이다.
마리오와 네루다는 나이, 신분, 지식,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정을 나누는 데에는 그런 모든 항목들은 유의미한 인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마리오가 품었던 네루다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한 이 자그마한 관계의 불씨는
차츰 상호작용을 하기 시작하면서 서로의 삶에 의미를 가지게 되고
또한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게 된다.
마리오는 위대한 시인 네루다로부터 메타포를 알게 되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메타포로 구애의 마음을 전한다.
삶이 한 편의 시와 같음을, 수많은 시어들과 심상들과 메타포와 운율로 만들어진 노래임을 깨우친 그는 인생의 희노애락을 메타포로 노래한다
<키워드 #2. 해학>
이 책을 읽는 도중에 여러차례 소위 ‘현웃’ (현실로 웃어버림) 터지는 순간이 있었다. 어릴적에 낄낄거리며 보던 만화책 이후로 참으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것이었다.
작가의 위트와 유머가 곳곳에서 번득이고 있는데, 특히 마리오의 장모님이 된 베아트리스의 엄마의 대사들은 해학과 날카로운 유머가 담긴 촌철살인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봐요 따님 정치와 시도 혼동할 정도로 똥오줌 못가리면 곧 미혼모가 되시고 말걸요"
"우리는 아주 위험한 상황과 맞닥뜨렸어. 처음에 말로 집적대는 남자들은 다들 나중에 손으로 한술 더 뜨는 법이야"
"말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야. 허공에서 사라지는 불꽃놀이일 뿐이라고."
"후끈 달아올랐을 때에는 약이 딱 두가지 밖에 없지. 교미나 여행"
이 밖에 여러 곳에서 남미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낙천적인 분위기가 유머러스하게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해학은 늘 이중적이다. 슬픔을 가슴에 담고 웃는 얼굴처럼.
혼란하고 폭력과 빈곤이 도처에 있는 암울한 세상에서 우정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작가의 필연적인 선택이 아닐까.
내가 작가였다고 해도 우울한 역사를 바라보며 남들과 똑같이 엄숙하고 진지하게 역사를 되짚으며 네루다를 조명하고 싶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키워드 #3. 사회주의와 쿠테타>
네루다는 칠레의 공산당원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의 일반적인 어감으로는 공산당 또는 사회주의란 단어는 비호감이겠지만 세계의 현대사에서 사회주의는 경제열강들에게 착취당하는 국민들의 빈곤을 구제하려는 동기로 민주주의의 상대편에 위치해 왔다. 칠레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대중의 큰 존경과 신망을 받는 네루다가 사회주의자로써 대통령 후보에 거론되고 그 결과 네루다와 같은 진영인 아옌데가 최초로 사회주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그 당시 칠레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참담한 수준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남미의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칠레도 미국과 유럽 열강의 식민경제정책의 희생양 노릇을 하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려는 네루다와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는 당연히 미국의 눈 밖에 날 수 밖에 없었으리라.
결과가 알려주듯이 불과 3년이 지나지 않아 아옌데 정부는 피노체트의 군부 쿠테타에 의해 무너졌고 미국의 입김을 등에 지고 정권을 장악한 피노체트는 20년간의 길고긴 독재정권을 휘두르게 된다.
무척이나 낯익은 이 스토리는...?
두말할 것 없이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많은 부분이 중첩되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힘겨루기와 자국 이익의 첨예한 대립이 펼쳐지는 운동장으로 한반도는 그 현대사를 쓰고 있다. 박정희의 군사 쿠테타와 장기 독재집권, 이후의 힘겨운 민주화 과정 등...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칠레나 대한민국이나 비슷한 아픈 과정을 겪을 수 밖에 없었나 보다.
<키워드 #4. 검은 물 >
한편 네루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부분에서는 우리가 흔히 보아온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가 언뜻 담겨져 있다.
<그 검은물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고 나무뿌리를 장식하고 있던 거무스름한 수공예품이자 결실의 밤을 일궈낸 내밀한 금은 세공품이며 만물의 모태가 대지라는 확고한 신념까지 준 바 있다.
또 모든 언어가 찾아 헤매고 고대하고 적합한 이름으로 명명하지 못해 주변만 맴돌거나 침묵함으로써 명명하던 것이 바로 그 검은 물이었다.>
작품 해설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네루다가 아버지의 무덤을 이장할 때 무덤 밑에서 검은물이 쏟아져 나온 것을 보고 많이 놀랐고 이를 통해 삶과 죽음과 대자연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였다고 고백했는데 작가가 그러한 네루다의 성찰을 빌려와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흰색, 파랑, 노랑, 빨강, 주홍...
세상의 모든 색을 한데 다 섞으면 검은 색이 된다.
검은색은 죽음을 상징하지만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시작을 의미한다.
마치 새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하듯이.
죽음은, 검정은
우리 인간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인 것이다.
아마도 검은 물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칭한 것은 이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죽음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슬프고
끝이라고 하기엔 너무 밋밋한
끈적하면서도 인간존재 모두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검은물
검은 색은 두려움의 색채라기 보다는
태고이자 영원이며 당연한 색으로 느껴진다.
<키워드 #5. 추신>
사실 편지는 추신이 제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적어도 나의 경험으로는 그렇다. (단, 이성에게 쓰는 편지에 국한한다.)
막상 본문에서는 뻔한 일상적인 이야기만 담다가
PS : 아참, 다음주 주말에 재밌는 영화가 개봉한다던데 혹시 시간되면 같이 보지 않을래? 연락할께~
이따위로 주제를 맨 뒤에 배치하곤 했던 우리들의 편지 아니던가.
물론 추신의 성공률은 매우 높았고, 중학교때 이런 추신으로 여학생과 함께 본 영화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나이트메어 4>였다. 너무 재미없어서 잊을 수가 없다.
네루다가 마리오에게 쓴 편지속에서 소개하는 노래가 있길래 찾아봤다.
리나 케티 "기다릴게요"
https://youtu.be/PCDZEG7HvD0?list=PLosQy4QrpaDKxTkjXnrPNn50ZvrF9mpQt
마무리
영화 <일 포스티노> 는 이 작품을 영화화하여 많이 알려져 있는 영화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배경과 잔잔한 배우들의 연기.. 특히 네루다의 실물과 무척 비슷한 남주의 모습은 오래도록 하나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남겨준다.
우정과 해학, 그리고 메타포..
함부로 살기엔 어른이 되어버린지 너무 오래되었고
꾹 참으며 보내기엔 인생이란 넘나 외롭고 불안한 시간들이 많지 않은가
우정을 나눌 사람과 함께 위로를 주고받으며
불합리하고 고달픈 세상사는 분노보다는 해학으로 받아넘기고
입을 닫아버리기 보다는 아름다운 메타포로 삶을 노래해보는건 어떨까
라고 네루다가 장난끼 있는 얼굴로 내게 묻고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