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항재와 태백산 장군봉
정선여행을 마치고 나니 하늘이 어두워졌다.
이내 비가 올 모양이다.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다가 태백으로 차를 몰았다.
얼마 가지 않아서 굵은 빗방울이 돋았다.
꽤나 높은 고갯길 도로를 꾸불꾸불 가다보니 <천상의 화원, 만항재> 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빗방울은 계속 떨어졌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고갯길을 계속 올라갔다.
강원도 정선과 태백, 영월이 경계를 이루는 만항재는 대덕산과 금대봉, 은대봉, 함백산을 거쳐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중 하나라고 한다.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도로라는 안내문이 걸린 만항재의 해발은 무려 1330m이다.
1330미터라니... 우리 고장 (인천) 에서 가장 높은 산도 해발 400미터가 채 안되는데.. 하며 잘 실감나지 않는 높이를 머리속에 떠올려보았다.
비는 아까보다는 조금 잦아들었기에 나는 우비를 뒤집어 쓰고 만항재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1330미터의 높은곳에 펼쳐진 천혜의 숲.
그 속에는 갖가지 야생화들이 있었는데, 아직 꽃이 만발할 때는 아니었나보다.
저벅저벅 내리는 빗소리 속에서 숲의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와 꽃나무의 향기들이 내 몸 속으로 들어왔다.
상쾌하고 시원하다.
그동안 들이마시고 살아온 온갖 매연과 담배연기, 미세먼지 등이
걸러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문득 이런생각이 들었다.
'높은 곳에 있는 나무들은 이리도 향그러운데, 왜 사람들은 낮은 곳에서 아둥바둥하며 사는 것일까.'
갑자기 높은 곳에 있는 나무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좀 더 높은 곳에 있는 나무와 산을 보러가고 싶었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다음 목적지는 태백산으로 마음먹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서 태백산 국립공원으로 갔다.
역시 이른 평일 시간이기도 하고 코로나로 인해서 그 넓은 주차장에 차는 고작 대여섯대 밖에 주차되어 있지 않았다.
백단사를 지나 장군봉과 천제단으로 가는 제1코스였는데,
평소에 산을 자주 다니던 몸도 아니고 최근 몇년동안은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내심 조금은 힘든 산행일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산행길은 그다지 가파르거나 힘들지 않았고,
아무도 없는 산길을 혼자서 천천히 걷다보니 주변의 경치나 꽃과 나무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또다른 엔돌핀을 생성해내기 시작했다.
예전에 다른 사람들과 여럿이 가는 등산은
때로는 누구를 챙겨야 했고
때로는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따라가야 했고
때로는 빨리 정상가서 사진찍고 내려와서 벌일 술판을 먼저 기대하곤 했었는데
이 모든 것들이 배제된 혼자만의 느긋한 등산은
무척이나 즐겁고 평화로웠다.
한참을 올라가니 주목이라는 나무가 나타났다.
붉은 朱 자를 쓰는데, 껍질과 목재가 붉은 빛을 띄고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견고하고 오래가는 나무라고 안내되어 있다.
천년이라니!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고작 백년을 겨우 살고 가는것이 인생이건만
나무는 그자리에 뿌리박힌채 아무말도 없이 천년을 서있다.
정상에 가깝게 다다르니 기이한 형태의 나무들도 눈에 보인다.
이미 고사해서 명을 다한 고목들도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백골이 된 것일텐데 저리 꼿꼿하게 계속 서있는 이유는 무얼까.
하이얀 나무의 자태와 주변의 푸르른 생명들이 어우러져 신령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장군봉 정상에 올랐다. 해발 1567 미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이 있다.
이 높은 곳에 올라온 옛사람들은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어떤 기도를 올렸을까.
산을 오른다.
땅에 발을 붙이며 살아야만 하기에
땅이 높아져서 산이 된 것을 알고는
높은 땅을 밟고 싶어 산을 오른다.
높은 땅을 밟으면 하늘에 그만큼 가까워지리라.
하늘은 밟을 수 없는 곳이니까.
올라가는 발걸음만큼이 정성이라 여기고
높은 땅에 올라가 소원을 빈다.
발걸음을 옮길 수 없는 나무들은
이 모든 광경을 묵묵히 바라본다.
사는동안 그리고 죽어서도 묵묵히.
태백산을 내려온 다음
영주로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