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도 없고 국제전화 카드 쓰던 그 시절, 러시아에 내가 있었다.
내 필명은 소네치카입니다. 쏘냐의 다정한 애칭이지요. 이 이름은, 나를 때때로 칼바람이 부는 외진 거리의 러시아로 데려갑니다. 마르슈르뜨까(버스의 일종으로, 외형은 노란 봉고차이다.)를 추워서 손 시려하며 기다리던 기억으로요. 십 년도 더 된 기억인데, 그 순간만은 그때 불던 칼바람처럼 생생해요. 어떤 생각을 했었냐고요? 국어 선생님을 꿈꾸던 내가, 어쩌다 이름도 날씨도 생소한 이 곳에서 노란 봉고차를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라는 운명의 아이러니함을 곱씹었더랬지요.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장래희망이 일관되게 선생님이었어요. 그러던 제가 어쩌다 보니 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 강의를 듣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항상 그렇듯 삶의 큰 조류를 일탈하지 못하고 따라가던 저는, 어느새 러시아 길거리 한복판에 서있었습니다. 이십 대의 저는, 드라마 속 사람들처럼, 아니 그냥 영문과 내 친구처럼 미국이나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고 싶었습니다. 그 시절, 드라마에는 병에 걸려 죽지 않으면, 모든 연인들은 갑자기 미국으로 유학 간다며 이별을 고하곤 했었지요. 그런데 나는 러시아를 가야 한다니!!! 스무 해 살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러시아로 떠나야 한다니! 내 미래를 위해 가면서도, 심연 깊은 곳에는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러시아 출발부터 모험은 시작되었습니다. 백야 투어라는 러시아와 잘 어울리는 이름의 투어 회사에서, 러시아 항공 표를 싸게 사고, 몸은 대한항공에 실었어요. 바로 갓 지은 솔솔 김이 나는, 하얀 쌀밥을 사랑하던 저는, 쿠쿠를 보자기에 싸들고 공항에 갔습니다. 그런데 짐 2개 이상 기내 반입이 안되더라고요. 눈물을 머금고 저는 쿠쿠와도 헤어졌습니다. 쿠쿠랑 생이별해서였던지, 난생처음 부모님과의 헤어짐이 슬퍼서였는지, 러시아란 나라가 무서워였는지 정체 모를 눈물을 비행기 안에서 펑펑 쏟았습니다.
울면서도 기내식은 때마다 챙겨 먹었더니, 어느새 러시아였습니다. 공항에 내려, 낯선 러시아 아저씨 차를 타고 기숙사를 가는데 생각보다 너무 오래가더라고요. 락밴드나 힙합 뮤직비디오 배경일 것 같은, 스산하고 음침한 기운이 가득한 동네였어요. 내 몸집만 한 개들이 어슬렁 걸어 다니고, 차가운 표정의 러시아 남자들이 지나다녔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은 페테르고프라는 도시의 자연대 건물이었습니다. 아니 이보시오! 나는 페테르부르크 인문대생인데, 지금 자연대 기숙사라니요! 심지어 여기는 제가 수업들을 학교까지 편도 2시간, 왕복 4시간 거리였습니다. 아! 첫인상부터 정말 녹록지 않은 나라구나, 일 년간 정말 쉽지 않겠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2호선 신도림역 못지않은 지옥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또 타야만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수업을 듣고 기숙사에 도착하면,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어요. 그 와중에도 하얀 쌀밥을 먹겠다는 강한 생존 본능으로, 저는 매일 냄비밥을 했어요. 지나고 보니 냄비밥을 하던 그 시간이, 힘든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힐링의 시간이었더라고요. 냄비밥 물을 맞추고, 밥을 먹고, 냄비에 들러붙은 밥을 긁는 반복되는 과정이요. (매일 같이 냄비밥을 하던 친구는 나중에 이야기했습니다. 저랑 그렇게 밥해먹고 오면 피곤해서 침대에 쓰러져 잤다구요.너무 힘들었다고...)
냄비밥 하고, 지옥철을 타던 그 무렵의 제 애창곡은, 박효신의 ' 해줄 수 없는 일'이 였습니다.
‘아무것도 난 몰랐잖아. 너를 힘들게 했다는 걸. 그런 것도 몰랐다는 걸. 도무지 난 용서가 안돼’
내가 아무리 힘들다고 펑펑 울어도, 한국에 있는 아무개도 모르겠구나. 싶어 매일 절절히 불렀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줄 수 없는 일이 없었어요. 그때가 2007년이었는데, 그때는 스마트폰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음울하고 회색 빛깔의 기숙사에서, 며칠간은 한국의 부모님께 전화도 못했어요. 핸드폰을 사려면 시내를 가야 하는데, 시내에 가는 방법을 처음엔 몰랐으니깐요. 국제전화카드도 어디서 사는지 몰랐습니다. (한국에 전화하려고 국제전화카드를 매번 사며, 매 번 달라지는 긴 번호를 잘못 누를까 초집중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고민을 털어놓고 걱정을 나눌 사람도 없고, 기댈 수 없던 나날들에 박효신의 해줄 수 없는 일을 웃는데 울면서 불렀어요.
그 후, 고국의 노래의 힘이 컸던지, 한국인의 도전 정신과 끈기로 시내 인문대 기숙사로 입성하였습니다. 꼬박 한 달 반 정도 걸렸던 거 같습니다. 매일매일 왕복 4시간의 거리를 찾아가서 여기저기 사무실을 들려 읍소, 간청, 애원 3콤보를 행했습니다. 저는 눈물 없이는 말할 수 없는 스토리예요. 러시아어나 제대로 배우고 오라던 비아냥 거렸던 기숙사 관리자, 서류 하나 떼는데 온 건물을 돌아다니고 결국은 다음날 돼서야 완료되던 일들, 고국의 소중함을 그때 알았습니다. 러시아에 있던 나날들은, 모험의 연속이었습니다. 눈뜨고도 바로 앞에서 소매치기 당한 일, 나보다 나이 어린 룸메이트의 바이올린 소리 핍박, 친구 방 룸메의 남녀 간의 사랑을 스테레오 서라운드로 지켜 본 일 등등이요. 한국 돌아오기 직전, 아쉬운 마음에 한국 음대생 집을 한 달 정도 빌렸었는데요. 갑자기 러시아 주인이 들이닥쳐 비가 철철 오던 날 쫓겨났던 클라이맥스까지, 정말 끝까지 호락호락 하지 않았던 나라였습니다.
제 인생은 그렇게 빵빵 터지거나, 굴곡이 많지 않습니다. 글을 쓸 때마다, 에피소드가 풍부하지 않아 관념적인 글이 많지는 않나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에 있던 일 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고, 이야기가 넘쳐났습니다.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는 느낌이랄까요.
동시에, 모험들을 헤쳐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던 곱씹을수록 행복했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던 나타샤란 친구와 거장 아시아 감독의 영화를 보러 갔는데 그게 하필 ‘색계’란 영화여서 같이 뻘쭘했던 일, (그땐, 그래도 어렸으니깐요, 심지어 무삭제판이었어요.), 한글학교에서 어설픈 선생의 한국어 강의를 경청해 준, 나이로는 동년배던 고려인 학생들, 중국인은 세상 어디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준 국비장학생 출신의 세상 똑똑했던 중국 친구들, 쏘냐는 영어를 몇 살 때부터 배웠냐며 한국의 영어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자격증을 따려는 아시아인의 교육열에 같이 동참해주었던 프랑스인 인 클로에, 나를 언제나 씩씩하고 유머러스하다며, 콩떡 같은 러시아어로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칭찬해주던 교수님 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갑니다. 짝사랑하던 무정한 남자 사람을 수십 번 버린 네바강, 한국음식이 그리워 대체재로 자주 들르던 학교 근처 중국식당 당인, 털모자랑 장갑을 종종 구매하던 센나야 시장이 눈 감으면 아련하게 그려져요. 나중에는 종종 그리워했던 힙한 갬성의 자연대 건물 까지, 이 지면에 할애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얼굴, 장소 이야기가 떠오르는 걸 보니, 스마트폰도 없고 데이터를 사서 쓰던 손 떨리던 그 시절의 러시아를, 저는 참 많이 사랑했나 봅니다.
(데이터도 없고, 인터넷도 느려 ‘텔미’ 신드롬 시절에 그 춤을 못봤던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일년 후 한국에 와서야 볼 수 있었죠.)
아쉬운 건, 그때 그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았던 싸이월드가 그대로 증발해버렸다는 겁니다. 이제 이 이야기는 나와, 나와 함께 교환학생 생활을 보낸 내 대학 친구 1명과 그 많던 친구들 중 연이 닿은 중국 친구 쑤시아 정도만 기억할 뿐입니다. 저는 그 후로 해외로 여행도 가고, 출장도 자주 갔지만,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요.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꼭 다시 가보려고 합니다. 내가 열심히 순수하게 살았던 그곳, 페테르부르크로, 내가 찐하게 사랑했던 그 시절 러시아로!
Ps. 십여 년 전 러시아 생활기라, 현재의 러시아와는
많이 다를 겁니다.
여행하는 것과, 정착하고 사는 것과는 또 다른 것
같아요. 좋은 기억도, 그만큼 나쁜 일들도 많았지만
남는 건 그리움과 애틋함인걸 보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