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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영 Jul 29. 2016

나의 첫번째 해외여행

두근두근, 두렵고 떨렸던 첫 여행

1. Hello, Execuse me!

내가 어렸을 때 해외여행은 굉장히 생소한 것이었다.

해외여행은 커녕 비행기 조차도 타봤느니, 못타봤느니 하며 친구들끼리 이야기 할 정도였다.

수학여행 갈 때 비행기를 탄다는 선생님의 말에 밤새 설레였던 것, 

비행기를 탈 때 탑승 게이트에서 승무원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운동화를 얌전히 벗어두고 탔다가 승무원을 당황케 한 일들.

이정도 였다.


국민학생 때는 국내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것 조차 또래에겐 대단할 일이었다.

내가 서울에 살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국민학교 2학년 때 서울 사시던 고모를 따라 창덕궁 구경을 간 적이 있었는데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다가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외국인에게 겁도 없이

"Hello, Execuse me!"

하고 배운 영어 단어 몇 개(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의..)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 친척들로부터 '천재'라는 칭호를 얻기까지 했다.

그만큼 당시 우리 사회는 외국인, 외국어, 외국여행에 대하여 굉장히 생소하고 두려운 대상처럼 여겨졌었다.


어쩌면 외국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던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을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94년도 아버지께서 당시 돈으로 280만원이 넘는 거금을 주고 삼성의 매직스테이션 486 컴퓨터를 사오셨는데, 그 때 겨우 Windows 3.1 운영체제에 Unitel, 천리안 같은 PC 통신의 맛을 볼 정도였다. 하지만 연예인 사진 한 장 다운로드 받으려면 30분이 넘게 기다려야 했을 정도로 속도도 느렸고, 결정적으로는 PC통신 네트워크 라인이 전화망을 이용했기 때문에 PC통신 접속 중엔 집 전화를 쓸 수 없어서 사용시간에도 굉장히 제약을 받았다. 이런 환경에서 외국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얻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얻는다고 해도 그 정보가 정확한지 알 수 없었다. 

<사촌들과 함께 간 창덕궁 나들이>


서점에 가도 여행에 대한 정보를 얻기란 어려웠다. 지금처럼 다양하고 훌륭한 여행 가이드북이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외국에 나가서 상황별 써야 할 '유용한 회화(Conversation)' 가 주를 이루었다. 정말 유용하게 쓰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거기에 언제 업데이트 되었는지 모를 지도 몇 장이 다였다. 이러니 외국에 나가는 것을 어디 생각이나 해보겠는가... 그나마 믿을만한 외국에 대한 정보는 직접 외국에 나갔다왔다고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중학교 때는 옆 반에 외국에서 살다 온 친구가 있었는데, 왠지 마인드도 한국 사람과 다르게 개방적인 것 같고, 걱정도 하나 없어 보였다. 나에겐 그 친구가 완전히 동경의 대상처럼 느껴졌다. 그 친구가 영어 수업시간에 영어 문장을 읽을 때면 갑자기 날씨도 맑아지는 것 같고, 그 친구가 빛나 보였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은 왠지 다 옳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만하면 당시 내가 얼마나 촌스럽고 무지한 아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뿐이다.




2. 나의 첫번째 해외여행

내가 처음 외국에 나가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대학교 1학년 여름이었다.

중학교 시절 친구를 통해 갖게 된 외국에 대한 동경심은 그 뒤로도 쭉 이어졌는데, 고등학교 때 대학에 합격한 직후부터 쭉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의 인생 목표인 해외여행을 나가기 위해서였다. 아이스크림도 팔아보고, 신문도 돌려보고, 우유도 배달해보고, 과외도 했다. 오로지 해외에 나가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돈이 모이질 않았고 해외여행은 접어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아버지께서 도움을 주셨다. 단, 아버지도 함께 가는 여행이었다. 나에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가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부족한 비용을 지원해 줄 테니, 계획을 짜보라고 하셨다. 어떻게 나에게 그런 행운이 왔는지 모르겠다. 당시 동생은 고3 수험생이었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함께 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당시에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당장 여행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챙기기 바빴다.


당시 나는 아직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미필자여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여권을 위한 심사서류부터 하나하나 준비를 해나갔다. 지금도 쓰는지 모르겠지만, 미필자가 해외에 나갈 때는 '귀국 보증서'라는 것을 작성했다. 보호자와 연대 책임자까지 적어야 해서 큰아버지께 가서 작성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만약 내가 귀국하지 않거나, 도착 예정일에 오지 못하고 불법체류기간이 발생할 경우에 벌금 5,000만원을 내야 한다는 문구 때문에 망설이시는 큰아버지를 설득하느라 애먹었던 기억이 난다.


우여곡절 끝에, 유럽에 날아가 첫 걸음을 떼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항주변이었으니, 한국과 별반 다를바 없는 도시의 밤 풍경이었지만, 왠지 모를 낯선 글자의 안내표지판들과, 우리나라와는 다른 경찰들의 유니폼에도 설렘을 느꼈다. 

'외국이구나!'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유로화로 환전할 당시에만 해도 이걸 냈다가 거절당하면 어쩌지 했는데, 물 한병을 사고 돈을 내밀었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받고 동전을 거슬러주는 것에도 나는 희열을 느꼈다. 처음 마셔보는 탄산수 때문에 한 모금 마시고 모두 버렸지만, 그래도 아깝지 않았다. 그곳은 너무나 아름답고, 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매일매일이 마치 파티와 같았다. 늦은 밤에는 모든 상가가 문을 닫고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네온사인 같은 것은 없었다. 불을 켠 간판은 맥도날드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첫 해외여행은 특별할 것 없이, 책에서 본 콜로세움, 에펠탑과 같은 것들을 실제로 확인하는 수준에 그친 어찌보면 여행이라기 보단 심심한 관광이었지만, 그것으로 부터 외국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으로부터 궁금증과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마치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보조바퀴를 떼면 큰 일이 날 것 같지만 막상 떼고 나니 이렇게 쉽고 편한 것을! 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로부터는 틈틈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돈을 모아 방학때마다 해외순방길에 올랐다. 가급적 대부분 전문 가이드 없이 자유여행처럼 가길 택했다. 처음엔 길을 잃을까봐 두려웠지만, 길을 잃는 것도 여행의 재미란 것을 깨달았다. 거기서부터 진정한 즐거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다.



3. 피가 되고 살이 된 소중한 경험들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정말 아름답고 즐거운 일이었다. 언제나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대학생때 친구와 둘이서 일본에 갔을 때는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나리타공항역'에서 내려야 할 것을 착각하여 '나리타역'에 내렸다가 하마터면 불법체류자가 될 뻔 했다. 딱 필요한 지하철 구간 요금만큼의 엔화를 남겨두고 전 날까지 모든 돈을 탕진했던 것이 실수였다.

우리는 다시 지하철을 탈 돈이 없어서 친구가 전날 기념으로 구입한 축구 유니폼을 길에서 팔까도 생각해 봤지만 한적한 시골 마을 출근길에 누가 그걸 사겠느냔 말이다... 


출근길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제발, 한 푼만 도와주세요!'

라고 구걸이라도 해볼까도 했지만, 일본말로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모르거니와, 한국사람이 일본에서 그러기엔 자존심이 또 허락치 않았다 ㅠㅠ


절망의 순간... 하나님은 우릴 버리시지 않았다.

다행히 주머니를 뒤져보니 한국에 가면 공항 리무진을 타려고 남겨둔 한화 만원짜리 한 장이 고이 접혀 있었다.나는 그걸 들고 은행을 찾았다. 직원이 은행의 셔터 문을 열자마자 곧장 따라 들어가서


"Exchange! Exchange!" (환전이요! 환전!)


이라고 외쳤더니 나이 지긋한 직원 분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 분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안내한 자리에 잠시 앉아 있으려니 아까 그 분이 과자와 따뜻한 차 한 잔을 주셨다.

'저는 지금 급해요, 비행기 놓치면 집에 못간다구요!'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일본어로 말 할 수 없어 참았다.

그 분이 작은 전표 하나와 펜을 주셨다. 나는 거기에 환전할 통화 종류에 체크하고 금액을 적은 다음 내가 가진 만원짜리 한 장과 함께 내밀었다. 적은 금액 때문에 직원분이 당황해할만도 했지만 감사하게도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고 잠시후 엔화 동전 몇 개와 한화 백원짜리 몇개를 내어주셨다. 


"ありがとう ございます!"(감사합니다!)


차는 뜨거워서 마시지 못하고 주신 과자만 집어들고선 급히 인사를 하고 은행 밖으로 뛰어나왔다.

"됐다!"

친구와 둘이서 급하게 뛰어 지하철 표사는 곳으로 들어갔다. 무인 발권기에서 표를 사고 우리는 출근길 지하철로 뛰어들어갔다. 하마터면 엄마, 아빠 얼굴을 못 볼뻔 했다는 생각에 아찔했지만 왠지 두근두근 하고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마터면 불법체류자가 될 뻔한 나의 두번째 해외 여행도 무사히 끝났다.


스마트폰과 로밍이 일반화된 요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엔 스마트폰도 없구, 학생인 우리가 비싼 로밍도 할 수 없었으며, 신용카드도 하나 없이 그저 환전한 현금만을 가지고 여행을 했기에 가능했던 경험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경험은 정말 아찔하다.

<친구가 하마터면 팔뻔 했던 Riquelme의 국대유니폼>


4. 이레, 이안이에게

이레가 경험한 세상은 참 작다.

이레는 집 앞 놀이터에만 가자고 해도 무지 설레여 한다. 분리수거를 하러 나가자고 하면 신나서 신발을 신고 현관에서 기다린다. 이레가 경험한 세상은 너무나 작기 때문에 그 안에서 적당한 희열과 기쁨을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더 넓고 다양한 세상을 아이가 경험하고 식견을 넓히는 것이 그의 인생에 정말 중대한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믿기에 그것을 가르쳐주고 싶다.


그것이 꼭 해외일 필요는 없다. 교과서를 통해 배우게 될 국내의 주요 유적들도 직접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 교육적인 것이 아니라도, 콘서트나 스포츠도 다양하게 경험해주고 싶다. 사실 이러한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모든 부모님들이 그러할 것이다. 다만 바쁘게 살며, 그 일상에 치이다 보니 마음처럼 아이들에게 해줄 여유가 없을 뿐,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모든 부모들은 내가 당장 굶어도 아이를 배불리 먹이려고 하실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가 점점 각박해져 내가 아무리 굶어도 아이를 배불리 먹일 수 없는 어려운 현실로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아이들, 미래 세대가 소중한 경험의 기회를 놓치지 않길 소망한다.


경험은 말로써 글로써 전달하는데에 한계가 있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이러한 경험을 직접해봤으면 좋겠다. 그러길 바란다. 아빠로서 내가 도와야 할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해주고 싶다. 처음부터 다 해줄 생각은 아니다. 그 아이들 스스로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한 전력질주를 하도록 지켜볼 것이다. 하지만 목표에 도달하기엔 미쳐 힘이 조금 모자랄 때 내가 모른척 나설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아이들의 인생이 탄력을 받을 수 있도록 아주 작은 구름판이라도 기꺼이 되어주고 싶다.


(엄마가 분리수거 하러 간다고 하니, 신나서 따라나온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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