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인지 다행인지 외할아버지와의 이별은 성인이 된 이후 처음 겪는 가족과의 이별이었다. 나는 거의 서른이 될 때까지 가족들과 사이가 좋았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덕분에 따뜻하게 채워진 시간 속에서 나는 외로움을 크게 느껴보지 못했다. 소중한 것이 많은 건 좋은 일이지만 그로 인해 잃었을 때 더더욱 힘들 수 있다는 사실도 미리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맞닥뜨린 이별 후에 가장 힘들었던 감정은 처음 느껴보는 근원적인 외로움과 두려움이었다.
날 진심으로 사랑해주던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생각. 결국완전히 혼자가 된 후에 느끼게 될 외로움. 그럼에도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여러 감정들이 뒤섞였던 모양인지 꿈 속에서 나는 자꾸만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안치실로 돌아갔다. 매일 밤 그곳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앞세우고 혼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계속 주저앉는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난폭하게 흐르는 시간은 나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잊으려 애썼지만 존경하던 할아버지가 기억을 잃고 기력을 잃어가던 순간들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사랑하는 모두가 먼저 떠나고 나 또한 무력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상상, 공허함이 뒤따랐다. 아무도 남지 않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에 쫓기다 잠에서 깨어나면 베개가 축축해져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억울해졌다. 당신과의 좋은 기억들은 희미해져가는데 아픈 감정만남아 나를 괴롭혔다. 상실감이 너무 컸던 탓인지이별의 기억, 마지막의 슬픈 감정만이 자꾸 떠올랐다. 평생 나를 잡아주었던 당신 손의 온기보다 마지막에 느꼈던 굳은 손의 한기가 더 강렬하게 기억났다. 유쾌하던 당신을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따뜻한 기억들만 멀어지는 것 같아 불안했다.
더군다나 기억을 잃어가던 당신을 지켜보았던 일은 망각에 대한 공포를 남겼다. 열심히 이룬 것들, 공들여 가꾼 관계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당신이 우리를 기억해주었으면 했고 당신과의 추억을 제대로 간직하고 싶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사실에 무기력해지는 대신 잊어버리더라도 다시 새기고 싶을 정도로 후회없는 추억들을 쌓으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무뎌지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두려웠다. 당신의 시간과 맞바꿔가며 남겨준 사랑과 용기를 잊을까봐 두려웠다. 이리저리 치이다 돌아보니 그 조건 없던 사랑을 잊어버린 후 일까봐, 삶이 추워 온기가 필요한 순간에도 다시 기억해낼 수 없을까봐 두려웠다.
시간이 소중한 것들을 더 쓸어가 버리기 전에 기록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든. 좋은 기억도, 슬픈 기억도, 당신이 알려준 것들을 기록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머리 색이 어둡던 당신과의 추억 여행 끝에는 언제나 이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기억을 되짚어 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마음 언저리에 내내 걸려있는 일을 계속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 기일에 마주한 당신의 유골함 앞에서 생각했다.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으로 하는 이별을 사람들과 함께 볼 수 있는 곳에 기록하기로. 그렇게라도 당신이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내 마음에 더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온기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고, 살면서 따뜻함을 잃을 것 같은 순간마다 내가 그 기억들을 한번씩 꺼내보기를 바랐다.
이 글은 나에게 당신과함께 한 시간, 그리고 이별을 용기내어 돌아보는 일, 세상에당신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어렵지만 그럼에도 찬찬히 해나가고 싶은 일. 그리고 한참 힘들었을 때 내가 그랬듯이 마음이 추운 누군가, 지금 혼자 일어서는 것이 벅찬 누군가의 힘듦에 공감해주는 일이 되었으면 한다. 당신이 가르쳐준대로, 바라던 대로. 먼저 손을 내밀고 아픔을 나누고 온기를 전하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