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도피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급 떠난 주말의 여수 여행. 전날의 술자리로 뜻하지 않은 숙취를 안고 헤롱거리며 용산행 열차를 탔다. 꿈자리도 뒤숭숭 요상하고 피곤한 아침이다. 아, 머리가 아프다. 여수에 가면 그래도 힐링이 되겠지?
숙취해소용 햄버거 하나를 해치우고 여수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상하게 몸은 피곤한데 잠이 안 와서 기차안에선 여행 계획도 조금 세우고, 못 보았던 예능 프로그램도 두어개 챙겨 보았다.
도착하자마자 우중충한 여수엑스포역을 마주했다. 하늘마저 날 돕지 않는구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도 잠시, 이왕 온거 태풍이 오더라도 즐겨볼테다 하는 오기가 생겼다.
1.5kg짜리 회사 노트북을 챙겨온 터라, 체크인 전까지 카페에 들러 급한 업무를 보았다. 마치 '지구를 구해라' 임무를 맡은 것마냥 나의 능력 부족과 과중한 업무량이 두려운 요즘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하는 것이 무서워 퇴사도 몇번이나 고민했다. 사실 아직도 고민중이다.
서너시간 카페에 앉았다가 남은 하루 반은 일따위 거들떠도 안볼테다 다짐하곤 노트북을 닫았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몇가지만 추려 밖으로 나왔다. 우중충한 하늘은 여전하지만 상쾌하고 설렜다.
출발 전에 먹은 숙취해소용 햄버거 외에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팠다. 약간의 검색을 통해 유명하지 않으면서도 정감 넘치고 맛있는 게장 백반집을 찾았다. 기대 이상의 친절함과 맛있고 푸짐한 음식이 만족스러웠다. 친절한 음식점 사장님은 왜 예쁘장한 아가씨가 홀로 여수에 왔냐며 다음엔 짐들어 줄 남자랑 같이 오라고 한다. 가식아닌 가식으로 배시시웃으며 '어휴. 그래야죠.' 대답했다.
서울의 '따릉이'처럼 여수엔 공영자전거 '여수랑'이 있다. 여수랑을 타고 오동도에 도착했다. 5년 전, 스물한살에도 친구와 함께 와본 적이 있는 곳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 당시 공사중이었던 터널은 깨끗하고 반듯하게 새로 닦였고, 헉헉거리며 올랐던 산책로 옆은 새로 공사중이었다. 그때도 자전거를 타며 버스커 버스커의 '여수밤바다' 노래를 들었는데.
흐리던 하늘이 조금씩 개인다. 저녁 놀이 지면서 이내 온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마법마냥 정말로 온 하늘이 붉어졌다. 심장이 턱 하고 막혔다. 대자연 앞에서 나는 역시나 조그만 인간 하나일뿐인데 왜 요즘은 사는게 힘들다 투덜대기만 하는지 슬퍼졌다. 붉고 큰 노을 앞에서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아름다운 풍경, 함께 보면 참 좋았을텐데. 엄마의 포근함이 그리워진다. 내 힘듦을 유일하게 온전히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 우리 엄마.
숙소 옆 치킨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치킨을 한마리 샀다. 여행, 호텔, 치킨과 맥주!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모여 마음을 꽉 채운다. 간만에 온전히 나만 생각할 수 있는 고요의 시간을 마주했다. 집에서 뒹구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니까? 혼자 여행과 호캉스가 최고다.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채비를 마치고 천사 벽화마을에 도착했다. 벽화마을을 찬찬히 둘러보다 한 카페에 도착했다. 오픈 20분 전이었지만 흔쾌히 자리잡을 수 있게 해준 직원분께 감사하다.
루프탑에 올라 큰 창가에 자리를 잡고 멍을 때렸다. 운 좋게도 이 넓은 공간에 나 혼자다. 바닷내음과 시원한 가을 바람. 어제의 흐린 날씨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맑게 개인 푸른 하늘이 내 앞에 있다.
두어시간 있다 카페를 나섰다. 곧 기차를 타야하니 주변을 조금 더 둘러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다니는 여행은 모든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편하지만, 예쁘고 아기자기한 골목, 특히 보기만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건 슬프다. 삼각대가 있지만 스마트폰과 핸드폰만으로 이뤄낼 수 없는 구도가 있으니까.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이순신 동상을 찍었다. 확실히 흐리고 난 뒤 개인 하늘은 너무나 맑다. 이런 곳에 일주일만 더 머무르면 어떨까. 그래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거야.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정답없는 세상 속에 '잘 하고 있다'는 한마디만큼 힘이 되는 건 없다. 여수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느꼈던 인간적인 외로움에, 혼자서 훌쩍 떠나왔다는 뿌듯함이 섞인다.
서울행 기차에 오르자마자 현실이 훅-하고 느껴졌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난 여전히, 주어진 현실이 두렵고 어지럽다.
그러나 정말 소소한 위로를 하자면 나는 이렇게라도 스스로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픈 것을 아프다 말할 줄 알고, 힘들 때 잠시 쉬었다 갈 줄 아는 그런 사람. 주어진 현실이 지금보다 더 버거워 질 때 나는 한순간 다른 길을 찾게 되겠지? 그때까지는 정답없는 일상을 견뎌갈테고.
이런 두려움조차 변명으로 느껴지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도 내가 탐탁지 않은가 보다. 내가 나를 온전히 안아줄 수 있도록 후회없이 노력하고 싶다. 아니, 그래야겠다.
여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