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아침이다. 눈을 뜨자마자 창 밖에서는 새가 지저귀고 초록지붕에 처음 이사 온 앤 셜리의 두근거리는 마음도 이랬을까. 이러한 감상엔 조용하고 감성적인 숙소 분위기가 한몫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혼자 여행의 좋은 점 몇 개 더! 첫째, 당일 계획을 전날 세워도 된다. 둘째, 당일 계획을 당일 바꾸어도 된다. 셋째, 철저히 내 위주로 준비하니 아침 준비시간이 짧다. 머리 말리는 거 화장하는 거 옷 입는 거, 까짓 거 모두 한 사람 템포에 맞추면 되니까 편하다.
오늘 첫 코스는 해안도로 길을 따라 1시간 30분 정도 종달리까지 걷는 거다. 가다가 종달리 수국길은 반드시 지나쳐야 한다. 오전 9시 30분경 길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아침은 어찌나 고요한지. 흔한 길고양이 한 마리 안 보이는 조용한 길을 혼자 걸으려니 무서움이 몰려오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보이는 파란 바다에 숨통이 트이며 누구보다 해안도로 길을 빠르고 멋지게 걷겠다며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생각해보면 이 날 아침은 참 걷기 좋은 날씨였다. 너무 덥지도 않고 바람도 솔솔 불고. 다음날 폭풍우가 몰려올 것이 예견되어 있음에도 참으로 즐거운 산책이었다.
제주에 놀러 오는 사람은 가족부터 연인, 친구, 그리고 나처럼 혼자 오는 사람들까지 참 다양하다. 요즘은 혼자 하는 여행은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 나 같은 혼자 여행객들은 일정 코스를 함께 움직일 '동행'을 구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음식을 먹을 때나 특정 관광지에 갈 때 함께 가는 사람이 있으면 말벗도 하고 즐거우니까, 또 어쩌면 돈이나 시간까지 절약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종달리에 도착해 카페에서 한참 책을 읽다가 배가고파 한 식당에 들어갔는데, 딱 봐도 어려 보이는 여자애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살면서 식당에서 합석하자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지라 아무래도 당황한 기색이 엿보였으리라. 낯선 이와의 합석은 처음이지만 이것도 경험이지 하는 생각에 제안을 수락했다. 확실히 혼자서 먹을 때보다 둘이 먹는다고 하니 테이블 자리도 빨리 나더라. 덕분에 웨이팅 시간을 줄인 셈이다.
나와 합석했던 아이는 스물두살에 광주에서 온 친구라 했다. 그 애는 내가 생각보다 나이가 많다며 놀랐다. 립 서비스라면 정말 리얼했고 아니었다면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스물두살의 여자애와 말을 하고 있자니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어색했다. 학교는 잘 다니니, 무얼 전공하니와 같이 어른들이 으레 묻던 지겨운 질문을 내가 하고 있었다.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아이에게 너무 성급해하지 말라는 상투적인 조언을 내뱉고는 속으론 에휴 나도 그저 그런 어른이구나 싶었다. 고작 다섯 살 많으면서 어른은 무슨 어른이냐구! 그래도 도움이 되는 한 마디를 해주고 싶었는데 전혀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이십대 후반은 처음이라 나도 서툴다.
이십대 초반 유럽여행에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숙소에 들르지 않고 돌아다녀도 하나도 힘든 줄을 몰랐다. 하루에 이만보, 삼만보는 쉽게 걸었던 것 같다. 밤에 푹 자면 당연한 듯 다음날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고. 근데 이번 여행은 달랐다. 아침부터 멈추지 않고 만 오천보를 걸었던 탓일까 금세 피곤해져서 숙소에서 한숨 자고 저녁 식사 장소로 향했다. 이때부터는 비도 추적추적 오기 시작하니 분위기 있는 맛집에 가서 와인 한 잔 하면 딱이다 싶었는데, 이곳저곳 찾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릴로'다. 이곳은 나만 알고 싶은 맛집인데, 굳이 공개하는 이유는 많이 유명해져서 서울에도 분점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비프수비드 꼭 드세요, 정말 꼭 드세요
친절한 사장님과 전화로 약속한 7시, 릴로에 도착했다. 가게 전체에서 느껴지던 따뜻한 분위기에 평화로움을 만끽하며 비프 수비드와 함께 레드와인을 홀짝거렸는데 지금 생각해도 천국 같은 순간이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먹었던 모든 음식 중에 릴로의 음식이 가장 맛있었다. 사장님 인스타그램과 가게 분위기로 미뤄보았을 때 프랑스에서 공부하시다 제주도에 프랑스식 레스토랑 겸 카페를 내신 것 같다. 정말, 정말, 정말, 내가 프랑스에서 뭘 먹었는지 모르겠을 만큼 이것이야 말로 프랑스 음식인가 싶었다. 아니, 음식의 국적을 버리고서라도 정말 맛있다. 한국식 프랑스 요리라 하더라도 충분히 고급지다. 나중에 프랑스에 가게 된다면 꼭, 비슷한 음식을 맛보리라. (대학교 때 갔던 프랑스 파리 여행에서는 감히 레스토랑 음식을 먹을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릴로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 후에는 말 그대로 '번개'가 성사되었다. 이튿날 우도 여행에 함께하기로 했던 동행을 만나 고등어회를 먹은 것이다. 혼자 여행에서 왜 동행을 구하는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근처 15분 거리에서 고등어회를 먹고 있던 동행이 양이 너무 많다며 와서 같이 먹자고 해준 덕에 맛있는 고등어회, 그리고 서비스로 나왔던 갈치회까지 맛볼 수 있었다. 함께 먹은 청하는 어찌나 달던지,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다. 잘 먹고 또 잘 먹어서 행복했던 둘째 날은 여기서 끝이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쿨쿨 곯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무 생각 없이 푹- 잘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