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봤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 꽤 옛날 영화인데 예전엔 청불이라 못 봤던 것 같고 그 이후엔 어디서 야한 영화라고 얘기를 들어서 별 관심이 안 갔었다. 그때만 해도 남녀가 욕조에 같이 있는 씬이 그렇게 야해 보일 수가 없었지. 어쨌든, 오랫동안 잊고 살다가, 며칠 전에 누가 인생 영화라고 추천해 준 것이 생각나서 보았고 다 보고 나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졌다. 케이트 윈슬렛의 표정연기에 마음이 아련해져서 잊고 지내던 첫사랑의 추억이 생각나더라니까.
인생에서 처음 접한 유형의 사람은 웬만하면 잘 잊히지 않는다. 특히 그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한나(케이트 윈슬렛)에게 마이클(랄프 파인즈)은 그런 사람이다. 첫 경험의 황홀함에 눈멀어버린 어린 소년이 아니라, 한 여자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죽을 때까지 묻어두고 가는 순정 가득한 사람. 사랑의 마음은 매일 다른 책을 읽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칫 엉뚱할 수 있는 요구도 그 시절 마이클에겐 사랑의 징표였다. 한나 역시 그런 마이클을 잊을 수 없었겠지? 다 늙어버린 한나의 슬픈 눈에서 한때 사랑했던 마이클에 대한 여전한 애정과 지나가버린 애정에 대한 아쉬움의 감정이 한 번에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매일같이 책을 읽어주던 마이클은 한참 뒤에나 한나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그 사실을 부끄러워했다는 것도. 글자를 모르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결국 한나로부터 마이클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 흔한 작별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살던 곳을 비워버린 한나. 말 한마디면 될 것을 그렇게까지 말하기 어려웠다면 이 사람에게 '무지'란 상당한 콤플렉스였을 거다. 무식이 죄라고, 훗날 나치의 친위대에서 앞잡이 역할을 한 죄로 법정에 서게 된 한나는 그 죄를 인정받아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어느덧 법대생이 된 마이클만이 그녀의 죄에 대해 정의와 사랑 사이에서 심적 갈등을 겪게 된다. 한나에게 함부로 죄를 묻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마이클 뿐이었다. 글을 모르는 한나가 외로운 감옥 생활을 견뎌낼 수 있도록 책을 읽어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는 장면에서 난, 마이클의 참사랑을 느꼈다. 그러나 마이클이 사랑했던 것은 젊은 시절의 한나이지, 늙어버린 죄인이 아니다. 한나는 마이클의 차가워진 눈빛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럼에도 실망했던 것은 한나의 태도다. 마이클 덕분에 글을 깨우치고 조기 석방 후에 새로운 보금자리와 일자리도 얻게 되었으면서 죄를 뉘우쳤냐는 물음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무책임한 답변뿐이다.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도 죄다. 정말, 무식이 죄다. 한나와 마이클의 사랑 이야기에 마음이 먹먹하기도 했지만, 죄를 짓고도 모든 걸 체념한 듯한 한나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다. 마지막엔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의 죄는 씻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 순간의 선택이 전체의 결과를 좌우한다는 것은 실로 무섭다.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고 함부로 돌을 던지지 말지어다. 지나가던 개구리가 맞아 죽을 것이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최악의 선택으로 최악의 결과를 내버린 상황. 상상하기도 끔찍하다.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죽음으로 갚으려 하지 말자.
먹먹한 사랑 이야기면서도, 시대가 만들어낸 결과에 마음이 아팠던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한나는 죄를 뉘우침에 자살한 것일까, 마이클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에 좌절해 자살한 것일까. 끝나갈수록 몰입도가 높아지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연출이며 인물들의 감정 묘사까지 참 좋은 영화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