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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사원 Nov 16. 2019

유통기한

2019년 이야기


어느 날 갑자기 멀어졌다.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다. 나는 가끔 관계를 망치곤 한다. 타인보다는 나에게서 원인을 찾으려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타인에게 비롯된 원인도 있겠지만, 글쎄 나는 그런 건 잘 기억 못 하는 타입이다. 멀어짐과 가까워짐 사이에 주도권을 잡지 못한달까. 대부분 수더분히 상대방의 결정을 따르는 편이다.


인간관계의 유통기한은 누가 정하는 걸까. 서로 관계 맺음에 있어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정할 만큼 가볍고 쉬운 관계는 없을 거다. 그만큼 가볍다면 그것은 '관계'로 치기도 민망하다. 그냥 옷깃만 스친 거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옛말은 다 거짓부렁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안 맞는 사람끼리 굳이 부대끼는 것만큼 잔인한 것도 없다. 그러니까 안 맞는 사람이랑 멀어졌다고 해서 더 이상 풀 죽을 내가 아니란 거지.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내가 다 망친 관계가 아니란 말씀이야. 나는 이렇게라도 위로를 해야 맘이 편하다.


어느 순간 멀어져 보니, 나 또한 알게 모르게 멀리 대했을 인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솟는다.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나이불문 옛 친구들아.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건강하길 바라. 보고 싶고 그런 건 아닌데 그냥 행운을 빈다.


정말 좋아하는 친구에겐 가끔씩 오래 보자고 한다. 문득 생각날 때 연락해도 항상 그 자리에 있길.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본 것처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할 수 있었음 좋겠다. 너무 이기적인가? 세상에 변하는 것은 많지만, 변하고 나면 서운한 것들도 있다. 오래된 친구나 편하게 입던 니트나 매일같이 신던 신발 같은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불편해지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더라고. 참치캔은 유통기한이 무려 7년이다. 올 설에 받은 참치캔 세트를 찬장에 넣어두고 몇 년이고 우려먹어도 된다는 말씀. 그러니 나는 참치캔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갑이다. 생각날 때마다 꺼내 먹어도 참치는 언제나 그 자리에. 평소에 참치 생각 하나 안 해도, 겉은 먼지가 쌓일지언정 속만은 그대로다.


관계의 유통기한도 길었으면 좋겠다. 촘촘하고 짧은 관계보다는 얽히고 설키더라도 가늘고 긴 관계가 좋다. 수백 번 맺고 끊어보아도 언제나 끝은 어렵다. 가까웠던 사람과 소원해지는 순간에 나는, 마치 내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마냥 우울해진다. 더 잔인한 것은 우리의 관계가 왜 파국으로 치닫았는지 파면 팔 수록 상처뿐이라는 것이다. 진실은 묻어두는 게 약이라니, 대답이 없는 것도 대답이라느니 하는 무책임한 말들이 나는 지겹다. 아, 부질없어라. 어쨌든 이 또한 경험에 의한 '그러려니'이므로 어느 날의 속상함에서 비롯된 주접에 불과하나, 갑자기 멀어지는 일방적 관계는 이제 그만두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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