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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석 May 09. 2022

현재 진행형 참회

리마인드 세계일주 열세 번째 이야기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향한 곳은 홀로코스트의 뼈아픈 숨결이 서려있는 곳,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이었다.

그렇게 마주한 박물관 내부는 콘크리트 질감으로 되어 있었기에, 전체적으로 어둡고, 또 천장도 낮아 답답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곧 안내문을 들여다보니, 이는 곧 아우슈비츠에 갇혀 지내던 유대인들의 무기력함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특별히 이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던 곳은 두 곳은 ‘홀로코스트 타워’와 ‘낙엽’이었다.


홀로코스트 타워는 어두운 공간 가운데 머리 위에 있는 좁은 틈 사이로 24m 높이의 아주 적은 빛줄기가 전부였다. 천장이 아주 높았기에 나는 그 사이로 바깥을 내다볼 수도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내 머리 위 작은 틈 사이로 내리는 적은 빛줄기만을 응시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밀폐된 공간 가운데 한참 동안 서 있으면서 당시 그들은 어떠했을지, 꽤 오랫동안 묵념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있는 한기와 어둠, 그리고 침묵으로 인해 한참 동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다음은 ‘낙엽’. 이곳은 나치에게 전쟁과 폭력으로 수없이 희생된 유대인 얼굴을 형상화한 약 만 여개의 철 조각들이 깔려있는 곳으로, 관람자가 이 위를 걷게 함으로 철 조각들의 마찰음이 마치 유대인들이 좁고 깊은 공간에서의 처절했던 비명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설명을 들은 후, 용기 냈던 내 발걸음은 외마디 비명처럼 들리는 마찰음으로 인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 자신을 마주했다.  

그렇게 유대인 박물관을 다 둘러본 나는, 다음 날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비로 향했다.

“저는 이 기념물들이 독일 시민에게 성스럽거나 거창한 무엇인가로 만들고 싶기보다는 오히려 이곳이 시민의 지름길로 사용되고 자연스럽게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으면 해요. 시민이 지나갈 때 이곳을 평범하고 편안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의 일부분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세운 피터 아이젠만이 한 말이다.


독일 항복 60주년, 즉 유대인 해방 60주년을 기념하여 축구장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넓은 땅 위에 아무런 설명도 표시도 없는 2711개의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홀로코스트 기념물을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 세운 것이다.


이 넓은 기념비 사이사이를 침묵을 지키며 걷다 보니, 양 옆으로 늘어서 있는 비석들의 무게들이 마치 생명의 무게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2차 세계대전 시기에 희생된 유태인을 기리는 위령탑 앞, 서독의 총리 빌리 브란트가 헌화를 하던 도중 털썩 무릎을 꿇었다.


당연히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빌리 브란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고, 한 나라의 총리가 무릎을 꿇는 광경은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기에 일부에서는 총리가 현기증으로 쓰러진 것인가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 나치에 의해 희생된 폴란드 유태인들에게 올리는 진심 어린 사죄였고, 빌리 브란트는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오랫동안 묵념한 것이었다.


12월 추운 겨울날 위령탑 앞 콘크리트 바닥은 차가웠지만 빌리 브란트의 참회는 뜨거웠다.

언론 인터뷰에서 빌리 브란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인간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인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폴란드 수상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던 차 안에서 브란트를 끌어안고 통곡하며 말했다고 한다.


“Forgivable, but Unforgettable.”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


베를린에 도착해 유대인 박물관과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거니는 내내  마음은 먹먹했다.

그것은 이와 같은  아픈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그럼에도 과거의 잘못을 감추는 것에 급급치 않고, 자신들의 뿌리와 역사적 과오를 잊지 않으려는 독일의 마음을 마주할  있었기 때문.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세운 아이제만의 바람대로 그들의 과오는 더 이상 숨길 그 어떤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참회는 그저 삶의 일부분이 된 것이다. 이미 반 세기 전 사죄를 하고 또 용서를 받았음에도 이들의 사죄와 반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보며, 다시는 이 땅에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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