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해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때라서 01

결혼에 대하여

by 호시절

집중하려 애쓰지 않아도 듣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것은 종종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순간에 숨어있다. 내가 평소 고민하고 있던 주제와 맞닿을 때, 특히 이야기 속 음성의 진폭은 점점 커지곤 한다. 카페에 있다가 우연히 옆자리 모르는 이들의 대화를 듣게 될 때 자신도 모르게 신경이 가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훔쳐 듣는 이야기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은 은밀하면서도 짜릿하다.


친구에게 물건을 건네줄 일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가던 어떤 날이었다. 비교적 한적한 시간이어서 자리가 남아있었는지 가장 좋아하는 끝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동 중에 항상 음악을 듣는 것이 습관이 되었던 터라 어김없이 투박한 유선 이어폰을 꺼내어 양쪽 귀에 꽂았다. 어떤 노래로 시작할까 플레이리스트를 내려보다가 김동률의 노래를 재생하였다. 노래가 시작하기 직전에 이어폰을 꽂은 귀를 뚫고 강렬한 단어 하나와 함께 풋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결혼은 뭘까?”


딱 봐도 앳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스무 살 초반 특유의 활기와 호기심을 고루 갖췄지만, 차분한 느낌의 여자가 엄마와 함께 옆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처럼 외출 후 귀가하는 느낌의 훈훈한 대화였다.


“음... 엄마가 느끼기에 결혼은 진짜 삶을 산다는 거야. 너 지금 아픔이나 고통 이런 것들이 사실 엄마나 아빠의 보호 안에 있으니까 잘 모르겠지. 엄마도 25년간의 어린 시절 이런 건 사실 잘 기억이 안 나. 물론 그때의 경험이 엄마를 만들었겠지만. 그런데 결혼을 하는 순간, 그리고 그 이후의 기억은 또렷하단 말이야. 결혼을 하면 내가 진짜 본격적으로 삶을 통솔하고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래. 그러니까 네가 나중에 누구를 만날 때에도 상대가 너무 좋다고 결혼을 쉽게 쉽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짤막하지만 질문에 담긴 의미와 차곡차곡 그에 응대하는 모녀의 대화는 지하철이라는 공간에서 그저 흘려보내기엔 묵직한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딸에게 하는 찬찬한 엄마의 조언은 내가 요즘 가진 고민과도 결이 닿아있었다. 사실 김동률의 노래는 진작 일시정지된 상태였다.


비혼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지만, 내 주변의 경우엔 해당이 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요즘. 많은 친구들이 한꺼번에 청첩장을 돌리다가, 요즘은 드문드문해지는 시기가 되었다. 결혼이 인생의 옵션에 있는 사람이기에, 사회에서 말하는 소위 ‘결혼 적령기’의 정점에 있는 나는 지금 만나는 사람도 없거니와, 나이에 걸맞은 행보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해서 책임감 있게 가정을 이끌어야 하고, 재테크도 열심히 해서 경제적인 안정감도 적절한 수준에서 유지해야 하며, 직장에선 연차도 어느 정도 쌓인 시기라 일도 실수 없이 해내야 하고, 주변 인맥들과의 관계도 잘 유지해야 하고 등. 어릴 때에는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한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서서히 무대에 등장하곤 한다. 그렇게 최대 고민 중 하나였던 ‘결혼’에 대한 모녀의 대화에서 이 나이가 되면 잘 해내야 하는 것들이 하나둘씩 불쑥 튀어나왔다.


“음 엄마 나도 그런 거 같아. 예전에는 막 좋으면 그냥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친구들 보니까 그것만이 다는 아닌 거 같고..."


나는 이어지는 모녀의 대화를 계속 듣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모녀는 팔짱을 끼곤 다정하게 지하철에서 내렸다.


결혼 얘기가 오갔던 3년을 넘게 만났던 남자 친구와는 그 문턱에서 헤어졌다. 그땐 많이 어렸다고 생각했던지라, 막연한 두려움과 잘 해낼 수 있을까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많았었다. 사실 그 이후로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는 모호한 느낌 외엔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잘 해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고, 오히려 그 무게는 해가 갈수록 더해지는 것이었다. 스무 살부터 막연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언젠가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이 꿈이라고 이야기했던 어렸던 나의 말이 얼마나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는 말인지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유지하는 과정을 담은 것이 아닌, 두 사람이 어떻게 ‘이혼’을 하게 되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니콜(스칼렛 요한슨)과 찰리(아담 드라이버)의 감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혼 조정을 하는 중 서로 사랑했던 이전의 서사는 상대방의 장점을 적은 글에 잘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차마 동시에 그 글을 읽지는 못했다. 그리곤 서로에게 온갖 폭언을 쏟아내고 상대의 마음에 굵직한 상처를 낸다. 한때에는 열렬히 사랑했고, 좋은 추억들을 쌓았던 그들이 그렇게까지 된 이유에는 상대에 대한 관심이, 존중이 부족해서였을까. 자존심을 꺾지 못해서였을까. 어렸을 때 봤더라면 아마 잘 이해하지는 못했을 영화를 보고선 씁쓸함을 느꼈고, 동시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넋을 놓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몸을 맡기고 있던 찰나에 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결혼을 하기 위해 매주 소개팅을 나갔던 친구가 진짜 결혼을 한다며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온 것이었다. 예비 신랑과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결혼을 한다고 하니 참 대단해 보였다. 몰랐던 누군가에게 어떻게 빠르게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사실 엄마 세대 때에는 다 그렇게 만나 결혼하고 잘 살기도 하고 그랬는데. 평소 나에게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것만 좀 덜면 쉽게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던 친구였다. 나는 어차피 생각을 덜려고 하다가 더 생각이 많아지는 타입이라 이번 생은 망한 것 같으니, 그 어렵고도 부러운 길을 차곡차곡 잘 걸어가길 진심을 담아 축하부터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하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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