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해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때라서 03
일하는 마음
“무슨 일 하세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요.”
사회에 나와서 으레 받는 질문에 나는 늘 위와 같은 대답을 한다. 이런 질문에 ‘교사예요’ 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대답을 고집하는 이유는 왠지 모르게 ‘직업’보다는 ‘일’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는 다소 수단적인 느낌이 강하다면, ‘일’은 직업보다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는 느낌이랄까(하는 순전한 주관적인 느낌이 있다). 발음에서부터 자로 잰 듯 딱딱 떨어지는 ‘직업’보다 ‘일’이 더 발음하기에도 쉽고 둥글둥글하지 않나. 아무튼 이 다음으로 나오는 질문은 대개
“원래부터 꿈이 선생님이었어요?”
“아이들 좋아해요?”
등이 있다. 이에 대해 나는 1. 원래부터 꿈은 선생님이 아니었고, 2. 가르치는 것은 좋아한다(고 착각했고), 3. 아이들도 좋아해요(과연 일을 하다 보니 먼저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에 학습된 것은 아닌지)등으로 답한다. 답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는 과연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었는지 복기하게 되는 것이었다.
하루는 스물네 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물네 시간 중 꽤 많은 시간 동안 직장에서 일을 한다. 그렇기에 일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당연하고, 일에서 작더라도 중요한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왔다. 나는 올해로 9년 차 경력에 접어들어 내년이면 10년 차를 바라보고 있는 애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쉬지 않고 일을 해왔기에, 육아휴직을 하거나 뒤늦게 임용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보다는 경력이 앞서지만, 아직도 일곱 명의 동학년 선생님들 중 나보다 어린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렇다면 교직에서 9년 차라는 의미는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일단 5년 미만의 신규가 아니기에 안정적인 학급 운영을 해내야 한다. 여기에 학교에서는 소위 ‘한창 일하는 나이’라는 인식이 있어, 같은 나이의 친구들은 ‘부장’이라는 (거의 봉사직에 가까운)직책을 맡기도 한다. 사실 학교의 행정업무에 대해서는 한 2000자 정도는 넘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그리고 이 글은 자칫 성토성 글이 될 것 같아 마음에 간직해두기로 한다), 아이들을 마주하는 일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사실 ‘지금까지 300명은 훌쩍 넘는 아이들을 거쳐온 것 같은데, 왜 나는 3월이 가까워지면 항상 신규가 된 것처럼, 마음이 콩닥거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어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 답을 글의 말미에는 찾을 수 있겠지!’라는 대책 없는 류의 기대감은 (슬프게도)없다. 선생님에게 1년의 시작은 사실상 3월이고, 1년의 마지막은 2월에 가깝다. 3월의 등교 첫날, 25명의 학생 수 곱하기 2, 그러니까 그 오십 개의 정처 잃은 불안한 눈이 나에게 고정될 때, 결연한 의지로 불태웠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미안함과 두려움이 앞선다. ‘나’라는 미성숙한 사람에게서 아이들이 좋은 영향을 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저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지는 않고, 잘하고 싶은데, 처음 마음을 1년의 끝까지 온전히 가져갈 수 있을까 등. 정체성 고민은 경력이 쌓일수록 더해가는 것 같다. 불안함을 잠식시키기 위해 정작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지는 않으면서. 그러다가 최근 선생님들 사이에서 유명한 글쓰기 교실의 강사 김소영 선생님의 에세이인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독서 모임을 하는 자리를 갖게 되었다. 모임의 멤버에 선생님은 나 혼자였고, 육아를 하고 계시는 두 분, 그리고 나머지 다섯 분은 일반 직장에 다니고 계셨다.
책에 대한 감상부터 짤막하게 언급해보자면, 아이들을 바라보는 김소영 선생님의 진심 어린 시선과 ‘어린이를 존중한다는 의지가 명확히 표현되는 순간, 어른의 여유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다’는 성숙한 어른의 자세에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는 것. 귀여우면서도 명확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책으로 모임에서 여러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어린이를 대하는 나에게 질문이 던져졌다.
‘어린이에게 배웠던 경험이 있나요?’
‘이 책을 읽고 어린이에게(혹은 다른 어린이에게) 상처줬던 경험이 생각난 것이 있을까요?’
‘실제로 어린이를 키우고 계시거나, 직업상 어린이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 분들이 계신데 이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저자가 이야기하는 어린이를 존중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나는 1. 아이들에게 크게 배웠던 경험이 있었고(어쩌면 매 순간일지도), 2.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적도 있었고, 3. 존중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데 잘하지 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이들을 많이 대하지만, 그만큼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나는 왜 내가 어린이였을 때를 자꾸 잊을까 하는 생각들이 모임 후 물밀 듯이 밀려왔다.
코로나로 지난 1년 동안 아이들이 잃은 것들이 많다고 한다. 관계의 단절과 소속감 상실, 자기표현 등. 올해는 지난해 읽은 것들을 회복하는 것에 더해 1년의 성장의 두 가지를 동시에 잡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막상 친구들을 만나면 3, 6, 9로 권태기가 오기 마련이라며 일태기라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지만, 나는 사실 아직도 아이들이 좋다. 이건 해가 지날수록 비록 맑지는 않지만, 농도가 짙어지는 느낌의 애정이랄까. 문득 오십 개의 눈동자가 나를 그저 ’ 선생님‘이기에 믿어주는 만큼, 나도 아이들을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미운 마음이 들거나 힘이 빠질 때면, 아래 구절을 떠올려야겠다.
‘어린 시절은 어린이 자신보다 어른에 의해 만들어지는 부분이 많은 구간이다.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수정할 수도, 지어낼 수도, 마음대로 잊을 수도 없다. 어린 시절의 어떤 부분은 어른이 되고서도 한참 뒤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시차는 추억을 더 애틋하게 만들고 상처를 더 치명적인 것으로 만든다.’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