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잡하다. 온갖 종류의 소음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유독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잠들기를 이내 포기하고 책상에 앉아 글을 끄적여본다.
이틀 전, 은행에 기한이 만료된 카드를 새로 발급받으러 갔을 때가 생각난다. 대기 중 전광판에 ‘치매’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화면에는 윤기 나는 흰머리의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그리고 그녀의 딸이 손을 잡고 있었다. 치매 관련 금융상품 광고였다. 지극히 광고스러웠다. 가끔 이상한 상상이 나도 모르게 떠오를 때가 있다. 그 순간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멀쩡히 잘 살아있고, 치매에 걸린 것도 아닌데 그냥 생각이 났다.
종종 사람들이 물어본다. 삶의 의미 혹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성공, 도전, 재미... 그러나 어떤 단어도 ‘가족’을 대체할 수는 없다. 나는 늘 지체 없이 가족이라고 답했다. 가족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우울증에 걸렸을 거라고. 왜 사는지 이유가 없었을 거라고. 학창 시절 공부를 할 때에도 나는 가족을 생각하면 힘이 났다고. 적어도 나에게는. 아빠, 언니 그리고 엄마. 그중에서도 엄마, 엄마, 엄마.
엄마는 내가 엄마를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를 것이다. 이상하게도 사랑하는 만큼 표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가족이 아닌가. 엄마의 ‘결혼해라, 결혼해라’라는 걱정의 속뜻을 파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엄마의 시선으로 혼자서는 아무래도 헤쳐나가기 힘든 세상이었을 테니. 엄마의 눈에 나는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아이니까.
나는 엄마의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내가 어릴 적, 거실 소파에 누워서 은희경의 책을 읽던 엄마의 모습을 사랑했다. 책에 빠지지만 않았다면 공부를 잘했을 거라는 말도 철석같이 믿었다. 이 나이에 이런 것도 모르면 안 된다고 다그치던 엄마의 ‘이런 것도’는 문학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었다. 보바리 부인, 이성과 감성, 주홍글씨, 오만과 편견, 테스, 이글스의 캘리포니아 호텔, 스팅의 노래들. 나는 엄마의 손맛도 애정했다. 엄마와 냉전 중이던 아빠가 국물 맛을 보더니 ‘그래도 네 엄마 음식이 맛있긴 맛있어.’라고 머쓱하게 말했던 때가 생각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엄마의 ‘마음 약함’을 사랑했다. 사랑했던 남자와 헤어진 그날, 어려서 이별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날, 엄마는 내 곁에 있으려 열차를 타고 올라오셨다. 이후로 나는 어떤 이별에도 엄마 앞에서만큼은 씩씩하려 했다.
새벽에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가던 중 길이 너무 어두워 엄마에게 전화했던 때. 너는 이제껏 나에게 기쁨만 안겨주었다는 칭찬을 들었을 때. 내가 처음 집에서 멀리 떠나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 캠퍼스가 너무 초라해 보여 뒤돌아 눈물을 훔치던 때. 너는 이제껏 세상을 성실히, 그리고 열심히 살아온 아이라서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한테 지극히 고마웠던 몇몇의 순간들은 퍽 우습게도 방심한 순간에 떠올랐다. 그것도 은행에서.
‘61번 고객님 창구로 와주세요.’
이 한 마디가 생각을 멈추게 만들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잘못하면 은행에서 눈물 바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 이야기로는 책 한 권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아빠는 모르는 엄마와 내가 나누었던 비밀 이야기들. 엄마의 답답했던 순간들. 엄마의 귀여운 순간들. 엄마가 나를 사랑한 순간들.
은행에서 나는, 이렇게 엄마가 떠오르는 시간을 잡고 또 잡아당겨서 엄마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