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길 잃은 사피엔스를 위한 뇌과학>을 읽고
가족 여행을 갔던 때가 떠올랐다. 지금보다 훨씬 젊고 건강한 모습의 아빠와 엄마. 그리고 뒷 자석에 함께 앉아 손장난을 치던 언니. 언니와 나는 차를 타면 당연히 목적지에 도달하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설핏 잠이 들기도 했고, 창밖을 구경하기도 했다. 엄마는 두꺼운 지도 책자 같은 것을 들곤 조수석에서 아빠에게 길을 알려주셨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기를 하나, 내비게이션이 있기를 하나. 그땐 그렇게 지도 하나만 가지고 국도를 타고 어찌저찌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길 위에서 길을 잃거나 길을 잘못 들어 투닥거릴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지 몰라도, 왠지 모를 낭만은 없어진 느낌이다.
다행히도(?) 스마트폰의 GPS 혜택을 받는 세대라 부모님이 행했던 길 찾기를 직접 경험해보지는 못했다. 해외로 친구들과 여행을 갔을 때, 길을 잃는 것보다 핸드폰 배터리가 떨어질까 더 전전긍긍했던 것은 스마트폰 없이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나 가족들 사이에선 길을 꽤 잘 찾는다며 여행을 가면 이동하는 데 앞장서는 것은 내 몫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여유롭게 길을 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엄청 긴장하고 있었다.) 길을 찾는데 실수하면 이동시간에 차질이 생기고 여행 일정에 무리가 생길 수 있으니, 늘 구글 지도를 확대하고 축소하면서 두리번거리곤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만큼 여행을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여행을 하다가 길을 잃어보면, 그 가운데 마주하는 낯선 상황들에서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좀 여유롭게, 발 닿는 대로 혹은 길을 잃으면서 여행하면 얼마나 더 많은 공간을 감각할 수 있을까.
물리적인 ‘길’ 외에도 관념적인 ‘길’을 생각했다. 나는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 목적지는 있는지, 목적지가 없다면 내가 가고 있는 길은 어떤 길인지 등. 답도 없는 질문을 수년째 하고 있다 보니 불현듯 좋아하는 작가인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나온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 필립은 시인인 크론쇼에게 인생의 의미를 물어본다. 크론쇼는 인생을 ‘페르시아 양탄자’에 비유한다. 필립은 소설 말미에 크론쇼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페르시아 양탄자처럼 완벽하고 아름다운 무늬도 있고, 특별한 무늬가 없는 것도 있듯이 인생이란 양탄자처럼 무의미한 것이다. 즉, 실패는 의미가 없고 성공 또한 의미가 없으며, 저마다 다른 인생의 무늬를 가지고 있다. ‘살면서 만나는 행복이나 고통은 모두 삶의 다른 세부적인 사건들과 함께 디자인을 정교하게 만들어줄 뿐이다.’(인간의 굴레에서 中) 길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계획된 길에 따라가는 것보다, 가던 중 길을 잃어봐야 비로소 자신만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곱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