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의 삼각형

어른이 된다는 것

by 호시절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어릴 때 자주 했던 말이다.


“어른이 되면 뭘 하고 싶은데?”


정작 어른이 되어서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막연히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사회가 규정해 놓은 일정 나이가 되면 ‘성인’이라는 타이틀을 쥐게 된다. 이 타이틀은 어린이였을 때, 어른들이 말했던 미지의 세계로 당당하게 발을 디딜 수 있는 입장권이 된다. 문제는 한번 타이틀을 쥐게 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고단한 레이스가 시작된다. 어릴 적 동경했던 어른들의 자유. 그 이면에는 각자가 짊어지고 갈 외로움이 있었다. 이 외로움을 예열한 때는 처음으로 집에서 나와 공동체 생활을 길게 했던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엄마 아빠 품에서 떠나 멀리 대학을 가게 된 스무 살. 예열이 끝나고 비로소 레이스의 첫 발을 떼게 되었다. 나를 보살피던 누군가의 품에서 분리가 되는 ‘물리적 독립’은 어른이 되기 위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기왕이면 독립해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좋아요.”


누군가 내게 이상형을 물어볼 때면 꼭 끝에 덧붙이는 말이다. ‘물리적 독립’을 통한 경험들은 ‘나’를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을 습득할 수 있게 도와준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고, 모든 것에 내 힘과 시간이 필요하다. 한 번쯤 독립해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더 단단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터에 나가게 되면서 ‘물리적 독립’은 ‘경제적 자립’과 자연스럽게 동반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레이스를 잘 완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를 품는다. 사회적 표지들을 차곡차곡 획득하는 것이 운보다는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학창 시절 진로 시간에 만난 그놈의 생애 주기에 따른 발달 과업. 왜 선생님은 계획은 깨라고 있는 거라고,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 왜 ‘이 발달 과업 그래프는 네가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도달하려고 미친 듯이 노력해야 하는 게 될 거야. 어쩌면 노력해도 안 되는 게 많을 거야.’라는 검은 면면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숨만 쉬면 돈이 든다는 자취 생활을 하면서 역시 어른이 되려면, 인정하기 싫지만 돈은 필수라는 걸 매번 생각한다. 생각보다 돈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 많다는 걸 어느샌가 깨닫게 된다. 이런 쌉싸름한 사실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어른이라면 가끔은 꿈속에서 표류하던 어린이로 돌아가고 싶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리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 외에도 심리적 자립이다. 타인과 관계 맺음을 할 때, 삶의 긴 레이스를 할 때 따라오는 외로움을 마주할 때, 불확실한 상황이 닥쳐올 때 자신의 감정을 읽고 붙잡고, 또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삶의 허무에 잠식당하지 않으려면 계속되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운동을 하며 체력을 끌어올리는 등의 여러 성장 경험들은 나의 심리적 자립을 돕는다.


마라톤 레이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다. 아직 세 가지 자립의 삼각형에서 어느 것 하나 똑 부러지게 하는 건 없지만, 나는 이 삼각형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물론 매 순간 좌절하고,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진 타인을 여전히 부러워한다. 그러나 어른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내 페이스를 잃지 않고 살아갈까 고민한다. 내게 주어진 과제는 반복되는 하루의 지루함을 견뎌내는 것 이외에도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고,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김찬호는 저서 <생애의 발견>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확신할 때,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만들어간다고 느낄 때, 인간은 성장한다.’고 언급했다. 자립의 삼각형을 넓혀가며 내 삶을 사는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


얼마 전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 그라데이션 잔소리를 한 바가지 듣다가 엄마에게 따졌다.


“이제 30대 중반인 다 큰 딸이고 어련히 알아서 할 테니 잔소리 스탑.”


옆에 있던 아빠가 같잖다는 듯 말했다.


“너네 언니는 보호자가 형부지만 너 보호자는 아직 엄마 아빠야. 억울하면 얼른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


후우. 결혼얘기 흐지므르그... 그러니까 한국 사회는 결혼이라는 걸 해야 어른이 되는 건가. 아직 보호자가 부모님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결국 ‘어른’이라는 건 상대적인 의미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80대 노모가 60대 아들이 외출하려 하자 차 조심, 사람 조심하라고 한참을 얘기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외출할 때면 목은 따뜻하게 하고 다녀라, 밤길 조심해라, 이어폰 끼고 길 다니지 말아라, 차 조심해라 등 이 나이에도 어릴 때와 똑같은 잔소리를 듣고 있지만, 부모님 눈에 나는 평생 어린아이로 남아있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쉽게 깨어질지도 모르는 계획을 하나둘씩 세워본다. 엄마 아빠에게 언젠가 '괜찮은' 어른의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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