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괴물의 선물

by 글똥


가끔씩은 홀로 숲을 찾는다. 앞서 가는 큰 바람, 뒤에서 나를 부르는 아기 바람을 모두 만나려면 혼자일 때가 좋다. 산 모퉁이를 돌 때면 저도 반가워 휙휙 소리를 내며 발목에 휘감기기도 한다. 슬며시 허리춤을 보이면 잽싸게 품을 파고 들어와 내 몸을 휘돌다 또 금세 빠져나간다.


내 체온을 좋아하는 바람,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곳에서 넉살 좋게 낙엽 무리를 들어 저만치 옮겨 놓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제 갈 길을 간다. 바람이 사랑한 자리, 햇볕이 데워 놓은 벤치에서 바람의 꽁무니를 보는 것도 즐겁다.


그늘진 오르막에서는 가끔 멈춘 바람을 만난다.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발소리를 듣고 그제야 슬슬 기지개를 켜는 바람, 깜박 낮잠을 잔 게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그다지 시원하지도 않다. 게다가 힘도 없다. 모른 척 지나가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내 뒤를 털레털레 따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메타세쿼이아길을 걸어 민속촌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우레 같은 소리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뒤돌아보니, 소나무 군락지의 우듬지를 흔드는 바람이 보였다. 지금껏 들어 보지 못한 바람의 노래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건지, 순간 숲의 모든 바람이 모여 우듬지에서 나를 기다린 것 같았다.


《거인의 정원》이라는 동화가 있다. 아이들이 오는 게 싫어 담을 쌓았던 거인의 정원은 새도, 나비도, 꽃도, 봄도 오지 않았다. 담을 허물고 다시 아이들이 오고 나서야 봄이 왔다는 거인의 정원이 생각났다. 꽃이 피지 않은 나무 아래의 꼬마를 번쩍 안아 나무 위에 올려 준 거인의 손, 비로소 꽃을 피우기 시작한 나무.


나를 뒤돌아보게 한 우듬지의 바람은 한참 동안 불었다. 쏴아아 쏴아아, 그 소리는 "사랑해, 힘내, 파이팅"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내 마음에까지 닿았다. 우듬지의 바람 괴물은 그제야 소리를 낮추고 소나무 다리를 건너 숲으로 다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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