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북 앤 무비

어디 갔어, 버나뎃

by 글똥

:마리아 셈플 저/이진 역/문학동네

영화:2020년 /리처드 링클레이커 감독/케이크 블랜쳇, 빌리 크루덥, 크리스튼 위그 외

이렇게 많은 편지를 읽어 보긴 처음이다. 책 한 권이 온통 편지다. 주인공 버나뎃, 온라인 비서 만줄라, 이웃집 여자 오드리, 딸인 비의 학교 선생 그리고 남편 엘진의 편지를 읽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간다. 아마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언니나 오빠의 다락방에 몰래 들어가 박스를 발견하고 모아 둔 편지를 꺼내 읽었던,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가 대문을 여는 소리에 화들짝, 후다닥 다락방에서 내려오다 엉덩방아를 찧던 추억 말이다.


한때 잘 나갔던 천재 건축가 버나뎃은 워커홀릭의 남편 엘진을 만나 결혼하고 딸인 비와 함께 살아가는 아줌마다. 그녀는 대인기피증으로 모든 업무를 온라인 비서 만줄라를 통해 해결한다. 만줄라와의 대화와 편지를 읽다 보면 코로나 19로 바뀐 요즘 세상을 보는 것 같다. 온통 이메일과 문자, 서류, 편지로 소통하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모든 모임이 줌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최근과 매우 닮았다. 이웃과의 대화가 힘들고, 남편과의 오해가 깊어지는 버나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짠하다. 현실의 많은 주부를 보는 것 같아서다. 내 이름과 시간을 내어주고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아가는 바쁜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알고 보면, 남편 엘진은 비서 수린과 바람이 났고 이웃 여자 오드리는 허영심으로 똘똘 뭉친, 흔히 말하는 치맛바람이 센 학모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일어나는 일이 버나뎃의 가정과 이웃에서도 역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딸 비는 엄마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사회성 제로이면서 문제가 있는 이웃으로 낙인찍힌 그녀에겐 얼마나 든든한 지원군이었을까. 사람은 나를 믿고 따라주는 일인으로 인해 삶이 든든해지고 풍성해진다. 버나뎃은 온라인 비서 만줄라와 함께 딸의 소원인 가족 여행을 계획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와중에 FBI 국제 사건에 연루되고 범인으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터무니없지만, 보이스피싱으로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걸 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그런 일들도 가득하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였으나 비서와 바람이 난 남편 엘진은 한술 더 떠 아내 버나뎃을 코너로 몰아세우기 바쁘다. 왜 그렇게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는지, 바쁜 내게 요구사항은 왜 그렇게 많은지, 왜 이렇게 대화가 안 되는지. 가장 믿고 힘이 되어 주어야 할 남편이 버나뎃의 제일 큰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딸에게도 이상한 엄마라고 설득하기에 이른다.


내 편이 아무도 없는 곳, 그 절박함의 끝에서 그녀는 용기를 낸다. 버나뎃의 머나먼 여정은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다. 피곤한 이웃으로 멀리했던 오드리가 버나뎃의 은신처가 되어 준 것은 버나뎃의 진실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겉모습과 남이 하는 이야기로 점철된 타인의 평가는 사물과 사람의 본성을 늘 왜곡시킨다. 좀 수다스럽거나 조용하거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도 조금 더 견디고 참아 주면, 서로의 마음이 닿는 지점이 반드시 있다. 버나뎃과 오드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엄마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 주었던 딸의 생각과 행동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비는 아빠를 설득해 쇄빙선을 추적한다. 남극 여행을 제안했던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엄마가 티켓팅을 해 놓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관심이 있으면 자세히 보게 된다. 오래 생각하다 보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버나뎃이 부럽다. 나에게도 예쁜 딸, 비가 있었으면 좋겠다.


버나뎃은 홀로 남극까지 왔다. 그리고 남극 기지의 건축을 담당한다. 雪평선과 氷평선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남극에 천재 건축가의 기지가 드디어 세워진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마주하게 되는 삶의 절벽이 있다. 버나뎃은 그 벽을 허물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극까지. 그리고 남편 엘진과도 잃어버린 사랑의 감정을 회복했다. 영화의 OST인 신디 로퍼의 ‘Time after Time’을 들으며 실제 존재한다는 빨갛고 파란 할리식스 연구 시설을 보고 있으면 선글라스를 낀 버나뎃이 그 문을 열고 나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당신도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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