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을 읽다가 너새니얼 호손의 《일곱 박공의 집》으로까지 건너온 여행. 일단은 출판사가 민음사였고 표지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전형적인 미국식 고딕 작품으로 그랜트 우드의 그림이라는 것도 알았다. 얕은 지식 덕분에 책꽂이의 《서양미술사》를 꺼내 여러 그림을 살펴보는 일도 즐거웠다.
박공이라 함은 뾰족지붕을 말한다. 하여 이 집은 고딕 양식의 뾰족지붕이 일곱 개나 되는 저택이다. 그것도 미국 동부, 세일럼 지방의 풍광이 끝내 주는 바닷가에 있다. 내가 만약 로또에 당첨된다면 건물을 사서 세를 받겠다는 도시적 야망을 거뜬히 이기고도 남는 스토리다. 동해나 제주의 어느 해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열린 통창으로 푸른 바다가 보이는 집을 지어 초록색 원피스와 노란 모자를 쓰고 브런치를 먹는 다음, 해변을 산책하는 중년의 즐거운 나를 상상만 해도 행복지수는 넉넉히 올라간다.
《일곱 박공의 집》은 부와 권력을 움켜쥔 동부의 핀천家가 매슈 몰家의 땅을 빼앗은 자리에 지은 집이다. 마녀 사냥으로 죽음에 이르고 삶의 터전까지 잃은 매슈 몰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끊임없이 솟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핀천 대령에게 화가 나기 시작하는 그때부터 우리는 주변의 누군가를 떠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집들이를 하는 날, 떡갈나무 안락의자에서 주검으로 발견되는 핀천 대령과 이후 집안 재산 싸움으로 형편없이 몰락한 그의 가문을 보며 권선징악의 희비를 경험한다.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면 내 눈에는 반드시 피눈물이 난다는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준 말이 사실이라는 기쁨도 잠시, 몰입의 최고조에 코를 박고 책장을 넘기는 당신과 내게 너새니얼 호손은 슬그머니 뜨거운 감자를 쥐여 준다.
후손의 후손들에게까지 전해지는 복수와 몰락, 어둠과 그늘, 피의 그림자가 박힌 역사의 수레바퀴는 5대가 지난 핀천家의 피비와 매슈 몰家의 홀그레이브에 이르러서야 어렵게 삶의 고리를 다시 이어간다. 그들을 통해 다시 시작하는 《일곱 박공의 집》은 내게 말한다. 탐욕과 미움, 질투와 분노는 복수와 불행을 낳을 뿐. 악의 뿌리에 집착하지 말고 선한 마음으로 그 모든 것을 끊어내라고. 용서가 힘들다면 벗어나기만이라도 하라고.
인간은 그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람답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삶의 결말은 과연 우리의 희망대로 흘러갈까. 농경사회를 지나 산업화,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빠르게 달려가는 자본주의의 가속도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수시로 돌아보는 삶의 여정이 필요한 이유다. 숨을 고르기 위한 멈춤이 절실한 이유다.
예외 없이 내 안에도 《일곱 박공의 집》은 벌써 지어졌다. 핀천 판사의 욕망의 희생양이 된 클리퍼드와 헵지바의 우울한 삶은 시대와 가문을 건너 이곳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나의 떡갈나무 의자는 벌써 흠뻑 젖었다. 습한 기운으로 벽은 푸른 이끼로 가득하고 햇볕은 여전히 이곳을 피해 뜨고 졌다.
지난봄부터다. 어떠한 연유로 나의《일곱 박공의 집》은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늙은 헵지바가 관리하던 구멍가게를 피비가 앞장서 거미줄을 걷고 먼지를 털어 활기를 불어넣은 것처럼, 아침엔 드립 커피의 향으로 온기를 더하고 클래식과 가스펠로 나의 심적 공간을 채웠다. 맑은 유리창으로 빛이 들어오고 창을 열면 세상의 공기가 바람을 타고 내 안의 잠든 세포들을 깨웠다. 숨죽인 어린 말들이 자음과 모음에 잇닿아 건강한 문장으로 쑥쑥 자랐다.
활발발한삶의 길은 내 안의 부정적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다. 좋은 것들을 생각하면 감사가 가득해진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것에도 긍정의 시선은 깃든다. 한때 누군가를 지독히 증오하며 권선징악의 대가로 유식한 척 읊조리던 노자의 문구 '天網恢恢 疎而不失'도 오늘, 버린다. 이 또한, 내 마음의 크고 큰 《일곱 박공의 집》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