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에 코끝이 시린 휴일, 등짐 하나 메고 산을 오른다. 무채색이던 세상을 건너니 푸른 소나무가 길을 연다. 걸음을 멈추고 연리지 앞에서 잠시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겨울 산책은 다른 계절이 주지 못하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나무도, 풀도, 물도 모두 잠들어 휴식하는 계절. 햇볕에 드러나는 건 오직 결빙의 세계다. 골짜기마다 투명한 얼음 결정체들이 바위를 덮고 있다. 결빙의 한가운데에 돌멩이를 던져본다. 얼음이 된 물은 단단해진 만큼 누구도 함부로 들이지 않는다. 저 단호함을 무기로 삶의 어느 순간을 결정짓고 이내 후회를 반복하는 우리네 인생과도 닮았다.
그러나 바위를 휘돌아 가던 물도, 바위를 삼키며 얼어버린 얼음도 계절 앞에 순종하는 자연스러운 몸짓일 뿐. 때로는 물처럼, 때로는 얼음처럼 살지만, 지금 저 두꺼운 얼음 아래 흐르는 물처럼 공존의 삶도 이미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오늘, 겨울 산책에까지 이르게 한 일 등 공신은 단연 책이었다. 이 년 전, 역 근처에 작은 동네 책방이 생겼다. 퇴근 후 들러 두세 시간씩 책을 읽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루의 마지막을 수놓았던 독서는 열심히 산 자에게 주는 위로이자 시간의 선물이었다.
라일락꽃이 흩날릴 때, 여수의 밤바다가 그리울 때, 통영의 백석 시가 나를 부를 때, 뜨거운 여름 연꽃의 만개한 시간을 누리고 싶을 때, 뼛속까지 서늘한 바람이 그리울 때 훌쩍 나섰던 길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하다못해 휴게소에서 마신 커피 한 잔도 추억이 되었던 이유다.
가방에 넣어 간 조정권의 <산정묘지>를 읊는다. ‘결빙의 바람이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치는 겨울 산’을 산책하는 일은 즐겁다. 산정山頂에 오르며 만난 겨울 산의 속살과 민낯이 더욱더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책에 갇혀 있던 글이 생명을 얻는 순간이다. 지치고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침묵하고 자연의 소리를 듣고만 있어도 슬픔과 고통은 견딜 만큼 가벼워진다.
바람 한 모금에 커피를 탄다. 매서운 바람일수록 커피의 맛은 진하다. 앞으로 남은 인생의 긴 여정은 산정에서 마시는 커피 한 모금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겨울 산책을 떠나 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