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11년 개봉/ 드라마/ 영국/ 마이크 리 감독/ 짐브로드벤트, 레슬리 맨빌, 리스 쉰, 피터 와이트, 올리버 맬트먼 출연
사계절이 있는 나라는 일단 행복하다. 계절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 수도있으니 말이다. 토요일 오후, 출근 안하는 날, 그래서 영화 보기 딱 좋은 날. 오후 2시의, 봄과 여름과 가을이 3월의 잠 속에서 하릴없이 흘러가고 화면은 어느새 겨울이다. 피곤할 때는 절대 영화를 보면 안된다. 잔둥 만둥, 본둥 만둥 시간만 흘러간다. 그래도 다행인 건, 천 오백원으로 구매한 올레 영화는 일주일동안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것.
어쨌든, 영국인들이 나오는 드라마 <세상의 모든 계절>은 한국의 <리틀 포레스트>를 떠올리고, 일본의 <인생 후르츠>를 생각나게 했다. 주인공 부부인 톰과 제리는 지질학자와 상담의사다. 그들은 주말이면 농장으로 가서 유기농 채소들을 키운다. 비가 오면 트럭에 나란히 걸터앉아 차를 마시기도 한다. 찐낭만, 찐행복이라 부르는 삶의 한가운데 그들은 오롯이 있다. 그들의 집은 또 어떤가. 우리들의 로망인, 아담한 정원이 있는 이층집이다. 영국의 런던에 저런 곳이 있다니, 가 보지 않았지만 저들은 분명 잘 사는 축에 들 거다. 그기준은 지극히 나의 관점이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영화는 대체로 봄이다. 모든 상황이 즐겁고 희망스럽다.
여름부터인가. 삐그덕거리는 삶의 모습 말이다.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인간계이다 보니,이런저런 사람들과 어울려 조화롭게 내지는 부자연스러워도 마주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생명들의 숙명이다. 아쉽게도 자존감이 뚜렷한 그들의 곁에는 대체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병원 동료인 메리도, 톰의 친구인 켄도, 톰의 형인 로니와 조카 칼도 그렇다. 흔들리는 그들을, 톰과 제리는 바라본다. 그리고 편안한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밥을 먹는다. 이야기를 나눈다. 잠자리를 제공한다.
톰과 제리의 아들 조이를 바라보는 메리의 불안한 눈빛도 나는 외면할 수 없다.왜 그리 안타까운가 말이다. 조이의 여자 친구인 케이티에게 질투를 느끼는 메리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내 남자친구가 될 뻔한 조이를 가로챘다는 메리의 분노가 화면 가득 뿜어나온다.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켄과는 얘기도 하기 싫다. 대놓고 짜증을 부린다.안정과 여유를 지닌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만, 자꾸 튕긴다. 인식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격 미달의 그녀다. 그런 자신을 감추고 싶으니 늘 혼자 이야기하고 수다스럽고, 정신이 없다. 그녀가 지은 거짓언어의 집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잘 마른 모래처럼 금세 바스라질 것 같다. 늘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시선이이 사실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준다.
그와 반대로 제리의 시선은 항상 차분하고 안정적이다.제리는 직장 동료이기도 한 메리를 초대하여 함께 밥을 먹으며 그녀의 이야기도 친절하게 들어 준다. 톰도 매우 친절하다. 몸에 배인 그들의 친절과 상냥함에는 실수가 없다. 그러므로톰과 제리는매우 이상적인 부부다. 제리는 주방에서 요리도 한다. 잠자기 전엔 함께 책을 읽고 대화도 나눈다. 심지어 그나이에 한 침대에서 자기까지 한다. 중년의 잠버릇과 고약한 냄새를 견디다니 참 대단하다. 아, 톰은 담배를 안 피우니 괜찮겠다. 분명 코도 안 골고 이도 안 가는 남자겠지. 그런 남자와 사는 제리가 부럽다. 그들의 일상은 즐거움을 주는 농담이 오고간다. 센스가 넘친다. 그래서 우울하고 불행한 메리의 기분까지 즐겁게 해 준다. 그들의 아들 조이도 마찬가지다. 여자친구인 케이티도 그러하다. 완벽한 가정의 그들은 매일의 삶이 행복하다. 이웃을 돌볼 줄도 안다. 평화로운 일상이 지배한다. 봄스럽게, 여름답게, 가을처럼, 겨울조차도 그들에겐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러나, 마지막 겨울에서 톰과 제리, 조이와 케이티, 메리와 로니가 함께 식사하는 장면에서 나는 자꾸만, 조금씩, 불편했다. 그들의 완벽한 삶에 누구도 들여놓지 않는 강력한 울타리가 자꾸 보였다.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는 로니와 메리. 메리를 바라보는 로니. 그들은 여전히 겨울에 갇힌 자들이었다. 톰의 가족이 내민 손은 어느 계절까지였을까. 꽃과 열매, 모든 것이 활발발한, 싱그럽고 찬란한 계절까지가 아니었는지. '가을까지는 함께 갈게. 더 이상은 안 돼'라고 선을 그어버리는 냉정함이 그날의 식탁에 차려진 것 같았다. 우월주의에 갇힌 손길은 동정이다.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메리와 로니는 그날 식탁에서 온몸으로 그걸 느낀 것 같다. 정말 견디기 힘든 계절은 겨울이었건만. 혹독한 고독을 온몸에 지닌 자들에게 행복한 네 명의 모습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 웃음에 스미고 싶은 그들을 일정 거리까지만 들여 놓는 모습은 어쩌면 겨울의 추위보다 더 날카로운 비수였지 않을까. 마지막 식탁에서 어쩌지 못하는 메리와 로니의 모습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들의 구석진 겨울에마음이 아팠다.
감독은 내게 말한다. 당신의 행복에 취해 그들을 동정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이 영화는 내 삶의 어느 계절을 향해 미리 던지는 경고장 같은 것이라 해도 되겠다. 나는 지금 어느 계절을 지나고 있는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나는 지금 제리인가? 아니면 메리인가? 매일 질문하고 답하고 진지해야 할 세상의 모든 계절이 지금도 내 곁을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