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웅정의 국민학교 시절을 읽는다. 중학교 진학과 축구 선수의 생활을 위해 필요했던 쌀 다섯 말. 그의 아버지는 막걸릿집에서 우연히 두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축구 천재라 열을 올려 이야기하던 아이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고 주고받은 막걸리 잔에 불콰해진 아버지는 반드시 축구를 시키겠노라 약조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손웅정은 축구 선수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가난한 살림에도 막내를 위해 쌀 다섯 말을 내어주는 촌부의 결심도 예사롭지 않고 손웅정의 재능이 아까워 술자리에서 회자하던 두 남자의 열정이 그 아비의 시간에 가닿은 것도 신기하다.
국민학교 시절, 내게도 맥주 한 박스의 추억이 있다. 군 대회를 앞두고 창설된 악대부에서 악장을 뽑을 때였다. 후보로 올라온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둘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손웅정처럼 가난한 농사꾼의 막내딸이었고 다른 한 친구는 나름 면 소재지에서 슈퍼를 하는 집이라 나보다 형편이 나은 친구였다. 당시 악대부를 맡았던 선생님은 이미 마음에 정해둔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조용히 나를 불러 "악장을 하려면 학교에 맥주 한 박스를 사 와야 하는데 니 사 올 수 있나?"라며 일침을 놓았다. 학교 앞에서 파는 20원짜리 어묵을 사 먹고 싶어도 입맛만 다시며 집으로 향하던 나였기에 맥주 한 박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나는 악장을 하지 않겠노라 하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어린 마음에도 그게 슬프고 속상했던지 운동장 구석의 수돗가에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닦아도 쉴 새 없이 흘러내리던 눈물, 지나가던 친구들에게 들킬까 봐 숨 죽여 울며 세수하는 시늉을 했던 봄날의 아픈 시간. 아득하니 잊은 줄 알았던 그 시간이 오늘, 손웅정의 쌀 다섯 말이 마중물이 되어 봇물처럼 터져 버렸다. 아직도 내게 이 사건은 아픔이고 슬픔이다.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지금의 내가 얼른 달려가 맥주 한 박스 그 선생님 앞에 부려 놓고 어린 내 손을 잡고 당당히 악대부를 나왔을 텐데. 친구가 리드하는 악대부에서 심벌즈를 치며 따라가지도 않았을 텐데.
손웅정만큼의 자존심이 내게는 없었던 것인지, 자존감이 낮았던 것인지, 현실 파악을 완벽하게 하고 적응을 한 것인지 아마도 상처받은 나의 12살이 아직도 맥주 한 박스에 갇혀 있기 때문 아닐까 싶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 과거의 상처는 현실의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추억이 되살아날 때마다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제 벗어날 때다. 손웅정의 어린 시절은 나를 위로하는 힘이 있다. 상처(scar)가 별(star)이 되는 힘이다. 박시교의 <힘>이라는 시가 있다.
꽃 같은 시절이야 누구나 가진 추억
그러나 내게는 상처도 보석이다
살면서 부대끼고 베인 아픈 흉터 몇 개
밑줄 쳐 새겨 둔 듯한 어제의 그 흔적들이
어쩌면 오늘을 사는 힘인지도 모른다
몇 군데 옹이를 박은 소나무의 푸름처럼
나의 맥주 한 박스는 소나무의 옹이가 되어 나의 내면을 더 푸르게 했을 것이다. 대나무의 한 마디가 되어 포절지무심의 삶으로 나아가게 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정직한 고백은 힘이 있어서 타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보듬어 따뜻하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봄날에 눈이 녹듯 그의 문장이 마지막 마침표에 이르렀을 때 나는 눈물과 함께 심연의 오랜 찌꺼기들이 빠져나간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카타르시스라고 말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그 선생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 생각한다. 여전히 무심코 내뱉은 그의 말에 상처를 받는 아이들이 있지 않을까. 나처럼 가난한 아이들의 희망을가시 돋힌 말로 꺾지는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그에게 닿았기를 바란다. 요즘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인기다. 부잣집 아이들의 노리갯감이 된 여학생이 나온다. 그녀의 학폭 희생과 복수를 다룬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는 인간과 짐승을 나누는 기준이 명확하게 나온다. 보는 내내 불편하지만 보게 된다. 분명히 존재하는 사회악이다. 물질로 커버되는 사회악이 난무하다. 잘못된 것을 판단할 수 있으나 단박에 고치지는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니. 얼마나 멋진 말인가. 심금을 울리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안다. 그러나 그것 앞에 대부분 무너진다. 나도 그렇다. 그래서 더 양서를 찾아 읽는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바른 어른을 만나면 깍듯해진다. 뒤따를 만한 삶의 걸음이 있으니 감사하며 내 발자국을 그 위에 올린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역린이며 역류다. 나는 가끔 멋진 말과 행동 앞에서 울컥할 때가 있다. 가슴을 울리고 엄청난 중력을 거슬러 내뿜는 따뜻한 눈물 한 방울의 힘은 재력보다 강하고 재물보다 빛난다. 손웅정의 기본은 바로 이것이다.
오늘도 센터에 가면 아이들을 만난다. 나는 나의 유년에 만난 그 선생님처럼은 되지 말자, 아이들에게 절대 상처를 주지 말자 다짐한다. 내 입술과 마음과 시선을 지켜 달라고 나의 신께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