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였구나. 제목의 의미를, 읽다 보니 알 것 같다. 다 읽고 나니 더 잘 알겠다. 우리에게는 모두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있다. 아직 기록하지 않았거나 이미 기록했거나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녀의 방식대로라면, 나의 해방일지는 내 아버지 사후의 일이 될 것이다. 문득 내 아버지 가고 난 자리에 어떤 생각들이 나를 일으켜 세울 것인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빨치산도, '오죽허면'은 더더욱 아닐 어떤 삶에 대해 나는 무엇을 기록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해방을 위해, 그리고 나의 해방을 위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가 아니라 내 살아온 발자취 같은 것이라 여겨졌다. 아버지로 말미암아 나를 다시 찾는 것이겠구나 싶다. 다행이었다. 그것은 가벼운 나를 조금 묵직하게 만드는 것이라 여겨졌기에. 정지아처럼, 그리고 정지아의 책을 읽고 그 행간에서 나의 아버지와 나를 읽어낼 사람에게 주어지는 삶의 선물이 아닐까 싶어서. 아버지를 잘 몰랐던 게 아리뿐이었을까. 나도 그렇다. 그래서 덥석, 그녀로부터 긴 글 받고 보니 마음이 심란하다. 읽어 내려갈수록 불투명한 내가 있음이다. 아직 서툴고 어리석은 내가 머리만 굵어지다 못해 속은 텅 비어 있는 채로 말이다. 제 딴엔 안답시고 하늘 향해 고개 빳빳이 들고 있으니. 설마 나만 그럴까? 아니겠지 싶은 마음으로 또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해방일지를 읽었다'로 끝내면 안 되는 책이다. 나의 아버지를 읽었다로 끝내도 안된다. 반드시 나를 읽어내야 했다. 전지적, 관찰자, 1인칭의 나를 모두 꺼내 후루룩 말아 단번에 맛봐야 했다. 언젠가는 죽어 남겨질 나의 해방일지는 어떻게 쓰일까 고민해야 했다. 나의 아들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해방일지는 살아갈 날에 힘 되는 것들이면 좋겠다 싶다. 넘어졌을 때 일어서게 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 다시 시작하는 일지가 되면 좋겠다 싶다. 그러다 어느 날, 지금의 나처럼 아들도 그의 아들과 딸을 위한 일지를 심사숙고하면 좋겠다. 어쩌면 이것도 부질없는 욕심이구나 싶다. 나의 몫은 내가, 아들의 몫은 아들이 하면 되는 것을.
그녀에게서 나를 읽었다. 그녀 말처럼 나도 오십이 넘었으니 망정이지, 아직 피 끓는 혈기 왕성한 사십 대 후반이었다면, 암이라는 몹쓸 것이 내 육체를 갉아먹기 전이었다면. 아마도 나는 아직 해방의 'ㅎ'도 읽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책은 내가 어디서, 무엇을, 어떤 상태일 때 읽는가에 영향을 받는다. 지금이 이 책을 씹어 먹기 딱 좋은 때라는 말이다.
유물론자라고 했지만 그녀 기억 속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혀 유물론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 숙식을 해결해 준 집의 마늘 반 접을 냉큼 서리해 간 방물장수를 향한 연민과 황톳물에 휩쓸린 지붕 위의 타인을 구하려고 냅다 달려간 아버지는 분명 유물론의 반대편에 있었다. 아버지의 담배 친구였던 노란 머리 여고생도 그렇다. 아버지 사후의 삶을 들여다보며 내 삶의 편린들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내 아버지의 삶보다 내 아이들에게 남겨질 나의 삶을 숙고한다. 등골이 오싹한 나의 사후. 지금 이대로라면 한 줄도 쓸 게 없는 속 빈 강정 같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 나의 해방일지는 사건의 기록보다 사색을 통과한 어떤 무늬였으면 좋겠다.
쉽게 펼쳤으나 쉽게 닫을 수 없는 책, 가볍게 읽었으나 가볍게 끝낼 수 없는 책. 건너뛰며 읽었던 사투리와 거친 문장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살아 꽃이 되는 것을 보게 하는 책.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한 죽음 앞에서 하게 만드는 책.
종이부시, 그녀의 해방일지 마지막 장은 다시 시작하는 해방일지의 첫 장이 될 것이다. 손에 펜을 쥔 당신이 써 내려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