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숲

여섯 신부들의 겨울나기

by 글똥

독감으로 맞이한 새해, 가래기침으로 일주일을 고양이처럼 갸르릉 거리다 오늘에서야 숲에 든다. 이파리 하나 남지 않은 나뭇가지에 오후의 햇살이 가득하다. 가진 것이 없으니 하늘의 모든 것이 삭정이 같은 빈 겨울을 채운다. 사람도 비운 자리에 비로소 채워지는 무언가를 깨달을 때가 있다. 인간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것들 앞에서 마지막 무릎을 꿇을 때, 모든 것을 잃었다 싶은 그때가 실은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말이다. 몸과 마음이 한 방향을 향한다. 사람도 자연도 섭리 안에 있을 때 더욱 값지고 귀하다. 오늘 빈 숲에 들었으나 공허가 아니라 충만을 느끼는 이유다. 송곳 같은 가지 끝에 머무는 바람과 햇살이 온통 조화롭다.


비어 있는 곳을 향해 걷는다. 2월의 겨울은 고요다.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이 있다. 보이지 않는 뿌리와 마른 뼈 같은 가지들이 모두 침묵한다. 겨울 속에서 그들은 언제나 끝까지 기다린다. 서둘러 잎을 내지 않고 급히 색을 만들지 않는다. 비어 있는 시간을 즐긴다. 가진 것이 없는 겨울에 더 여유롭다. 나는 이것을 자연의 소요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안에 여섯 신부들의 기다림이 있다.


며칠 영하의 바람이 불었다. 시베리아에서 불어 온 찬 공기에 손과 발이 시렸다. 녹기 시작하던 포도지의 물이 다시 얼었다. 보리싹은 고개 내밀고 자라다 불쑥 멈추었다. '얼음'하고 성장을 멈춘 연둣빛 이랑마다 길고 고른 햇살이 '땡'하고 훑으며 퍼져 나간다. 행여나 초록순이 잠들까 봐 여섯 신부는 그림자도 움츠리며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꽁꽁 묶는다. 늘어진 가지 사이로 흘러내리던 바람도 이내 고랑 사이로 숨는다. 반짝이는 햇살과 짧은 그늘이 시시각각 고랑과 이랑을 넘실댄다.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다. 양지가 가득한 곳, 적요의 풍경 속에 출렁이는 봄이, 새침한 여섯 신부 곁에서 서성거리다 왕버들처럼 늘어진 가지의 뭉툭한 망울 앞에서 오래 머문다. 곧 만개하겠다. 개화할 그녀들의 들러리가 되고 싶은 내 발끝에도 봄향기가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