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라색 목도리를 두르고

by 글똥

숲 산책 동무가 부스터 샷을 맞고 칩거 중이다. 깐깐한 국민 비서 덕분에 그녀는 삼일째 꼼짝도 못 하고 있다. 보름 뒤면 또 나를 감시하러 올 터, 그전에 부지런히 걸어야지 싶어 집을 나선다.


창 너머 햇살은 따스한데 바깥바람은 차다. 얼마 전 친구가 선물한 목도리를 두른다. 방사선 치료 후의 폐렴 주의보가 아직 발령 중이다. 하여 꽁꽁 동여매고 걷다 보면 땀이 흥건하다. 갱년기의 요망스러운 몸 장난에 벗었다 둘렀다를 반복하며 걷지만, 구불구불 숲 산책은 그 모든 번거로움를 상쇄시킬 만큼 가치 있다.


그럼에도 자주 만나는, 벌거벗은 산은 참 볼품없다. 아무리 예쁘게 보려고 해도 칙칙한 갈색 잎과 거무튀튀한 나무뿐이다. 간혹 볕 좋은 자리에 초록의 풀이 한 둘 돋아나지만, 갈증을 채우기엔 역부족이다. 무던히 애를 써도 겨울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듬성듬성한 나무 사이로 저편 길에 든 사람이 보인다. 우거진 숲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을 자리, 그는 파란 모자를 썼다. 노란 패딩점퍼를 입은 아줌마, 빨간 등산화를 신은 아저씨, 초록 가방을 멘 청년도 지나갔다.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지나간 그의 길을 따라 걸었다. 프렌치 메리 골드를 닮은 노란 패딩의 그녀는 색색의 나비를 온몸에 감추고 나풀거리며 걸어갔다. 장마 뒤에 불쑥 자라난 붉은 버섯을 닮은 그는 발자국마다 여름을 남기고 사라졌다. 걸음도 힘찼던 청년은 곧 시작될 봄날의 초록 잎을 닮아 더욱 싱그러웠다. 나는 보라색 목도리를 두르고 지난 여름, 각시갈퀴나물이 무리 지어 피었던 포도池에 잠시 멈추었다. 뚜벅뚜벅, 도란도란, 시끌벅적. 쉴 새 없이 봄과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지나갔다. 표현할 수 없는 무수한 색과 빛, 언어와 노래, 몸짓과 행동으로 숲은 갑자기 풍성해지기 시작했다.


겨울 숲이 나를 부른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았다. 숲의 빈자리는 인간을 위해 마련된 특별 무대였다. 숲에 든 사람이 봄이었고, 여름이기도 했으며 가을 그리고 겨울이 되기도 하는. 오늘 나는 친구가 선물한 보라색 목도리 덕분에 월의 어디쯤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