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文城)-잃어버린 도시

위화 장편소설, 문현선 옮김, 푸른 숲

by 글똥

이 소설은 청나라 말에서 민국 초기의 시절을 배경으로 쓴 것이다. 작가 위화는 모옌, 옌롄커와 더불어 중국 3대 현대 작가로 불린다. 1960년 중국 저장성에서 태어난 그는 올해 64세다.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 <인생>은 지난번 모임에서 나누었던 소설이다. 보통 한 작가의 소설을 두 번씩 모임에서 다루기가 쉽지 않은데 위화의 위상이 독서모임에서도 상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된다면 그의 산문집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과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을 읽어 보고 싶다.


이 소설에는 린샹푸, 린바이자, 천융량, 리메이롄, 천야오우, 천야오웬, 샤오메이, 아창, 구이민, 구퉁녠, 구퉁웨, 구퉁르, 구퉁천, 구퉁쓰, 구퉁넨, 톈다 등이 나온다. 이름들이 독특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샹, 녠, , 톈 등의 발음이 재미있다.


내게 린샹푸는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아날로그 사람이다. 아날로그란 윤리와 도덕,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장 <원청> 답게 표현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디지털 세계의 내가 사라지고 그들과 함께 아날로그의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다. 북쪽에서 남쪽의 원청까지 린샹푸와 동행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바짝 붙어 가지는 않는다. 나는 그와 늘 거리를 두고 걷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린샹푸에게서 어떤 냄새를 맡는다. 갓난아이의 배변과 젖트림의 시큼함,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남하를 계속하는 한 아버지의 고난의 냄새가 나를 힘들게 한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자연 속에서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린샹푸의 여행과 걸음은 생존이다. 굳이 잃어버린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부호였던 북쪽의 삶을 버리고 시진까지 내려오게 한 것은 낯선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린바이자 때문이다. 부성애가 넘치는 린샹푸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굳이 고난의 길을 가야만 했나 싶다. 그곳에서 충분히 린바이자를 잘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이해하고자 들면 안 되는 사건들로 비일비재하다. 그의 삶이 그렇다. 사람마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개별성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함께 살아가기 힘들다. 린샹푸는 남들이 이해 못 하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원청에서 그는 사람들을 만난다. 구이민과 천융량, 리메이롄 등이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이 곁에 있을 필요는 없다. 내 삶의 기둥이 될 만한 사람 한 둘만 있어도 우리는 인생이 든든하다.


시국이 어수선한 때, 노략질을 일삼는 토비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매우 잔인하다. 인질로 삼은 자의 가족이 돈을 보내주지 않으면 사정없이 죽인다. 집을 불태운다. 가진 자들의 재산을 거덜낼 때까지 흥청망청 먹고 마신다. 동정과 의리가 없는 극악무도한 토비들은 한마디로 깡패다. 의적이 아니다. 그런 토비에게 린샹푸의 딸 린바이자가 잡혀갔다. 리메이롄은 그 사실을 알고 아들 천야오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P.164 리메이롄이 큰아들 천야오우에게 말했다. "얼른 따라가서 린바이자 대신 네가 가. 너는 남자니까 '맷돌질'을 당해도 아픈 거로 끝나지만, 린바이자는 '풀무질'을 당하면 평생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거야."


결국 천야오우는 잔인한 토비들에게 한쪽 귀를 잃는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천야오우의 기우뚱한 걸음은 그의 가족과 린바이자로 인해 바르게 걷게 된다. 우리의 상처가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지 그들은 보여준다. 두 가족의 모습과 대화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삶에서 '사랑'이라는 낱말을 가슴에 품게 된다. 무엇보다 나는 엄마라는 이름의 그녀의 선택과 아들 천야오우의 순종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원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잃어버린 도시에서 말이다. 그곳은 우리의 도시이기도 하다.내 마음의 도시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도시에서도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한다. 삶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울어 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 인생은 헛되지 않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이타주의보다 이기주의를 앞세운다.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자본주의가 파괴되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자본가들은 언제나 이기적으로 살라고 떠든다. 내게 원청은 그것을 철저히 파괴한다. 내 의식이 자리 잡기도 전에 세뇌돼 버린 인생살이가 책 속의 여러 문장들이 불쏘시개가 되어 조금씩 데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극한의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은 매우 아름답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P.111 린샹푸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겨울의 눈꽃' 속에 다시 시진으로 들어갔다.


그의 모든 선택은 옳았다. 그는 어떤 삶을 스스로 선택했고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린샹푸의 삶을 공감하기로 했다. 누군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할 때 "왜 그랬어?"라고 하지 않고 "그랬구나!"라고 공감해 줄 때 마음에 햇살 한 줌이 내려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햇살 한 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누구에게나 잃어버린 도시가 있다고 했다. 린샹푸에게 원청은 그런 도시였다. 아날로그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가게 하는 도시였다.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도시, 내가 찾아 떠나야 하는 원청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결국 우리도 린샹푸처럼 죽음의 끝에 이르기까지 원청을 찾아 헤맨다. 마땅히 지금 나의 현재, 나의 위치, 나의 모습은 원청의 어느 지점에서 또 다른 린샹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 떠나는 한 인간의 삶이 거룩해지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원청>은 말해 주고 있다.

나태주 시인의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중 <별>이라는 시에 이런 글이 있다


P.54 누구나 자기의 별을 하나쯤은 마음속에 지니고 사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인생이고 멀리까지 씩씩하게 갈 수 있는 삶이다. 그렇지 않을 때 그 사람은 흘러가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남을 따라서 흉내 내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나는 린샹푸의 원청이 바로 그 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여정이 힘들고 쉽지 않았으나 그는 마침내 별처럼 빛나는 생을 살았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원청을 덮는다.


Scars into St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