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골드, 익숙한 낱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렌치메리골드다. 자주 가는 숲의 어느 산모퉁이를 돌면 향기로 나를 먼저 반기는 꽃이 있다. 나비 떼가 꽃들 사이를 오가며 천상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초입에 그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이어서 여우꼬리, 서머라일락, 백일홍과 울릉국화까지 그곳은 쉼 없는 꽃길로 이어진다. 꽃들 앞에 서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출근시간이 임박하여 서둘러야 함에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는 것은 박주가리꽃 진 자리다. 예외 없이 매달린 열매를 한 입 먹어보는 것이 내게는 기억 저편에 있는 행복한 추억을 소환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프렌치메리골드'라 쓰고 '메리골드마음세탁소'라 읽는다.
P63 '살아가는데 힘이 되어주는 얼룩은 마음의 나이테가 되지만, 자연스레 사라지지 않는 얼룩은 간직할수록 상처나 아픔 혹은 결핍 같은 것들이 되어 나타난다'
그녀가 내게 준 얼룩은 마음의 나이테가 될 수 있을까. 몇몇의 그녀들이 내게도 있다. 아직, 여전히 얼룩으로 남아 나의 불편함으로 자리 잡은 그녀들. 지은이 내게 티셔츠를 건넨다. 나는 재하가 들어간 2층 세탁소로 함께 올라간다. 나는 어느새 하얀 티셔츠를 입고 나를 힘들게 하던 기억들을 차곡차곡 꺼낸다. 하얀 셔츠에 하나 둘 얼룩이 생긴다.
P65 '상처도 인생인데...'
모든 걸 지우고 나면 인생에 남는 게 없다. 상처도 인생이라는 말. 공감할 수밖에 없다. 나의 버팀목의 8할도 결국 상처로 인해 단단해진 것이다. 특히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 앞에 서 본 사람은 그 상처가 주는 아픔과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고독의 심연을 오래 헤매고 다닌다. 그리고 그들은 어두운 그 자리를 맴돌다 수면으로 떠오른 자에게서 그곳의 냄새를 맡는다. 옹이처럼 솟아난 자국도 같이. 언어보다 비언어를 통해 사람들은 아교 같은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특히 불행의 연속선상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스쳐 지나간 지점을 정확하게 발견한다. 모른 척 곁을 지키는 그 마음도 몽글몽글 전해지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들은 서로 잇닿아 있다. 지금은 그 상처를 견디는 시절. 말끔히 지우고 싶다는 욕심은 살짝 내려놓아도 좋은.
P78 '어떤 얼룩은 직접 손으로 지워야만 지워지거든.'
연희의 첫사랑 희재. 음악을 하는 남자에게 한없이 퍼주기만 한 그녀. 3년의 뜨거운 사랑을 뒤로하고 다른 여자에게로 가버린 남자. 천만 원의 대출을 남기고 떠난 남자. 피식 웃음이 나는 청춘들의 사랑. 나는 이미 그 시절을 아주 오래전에 지나왔고, 그 시절을 보낼 아들이 성큼 자라 있는. 그럼에도 마음은 청춘의 연서를 그리워하며 감히 연희의 애틋한 감정선 위에서 리듬을 탄다. 손으로 지워야만 하는 얼룩이 배신한 남녀 간의 사랑뿐일까. 고부지간, 동서지간, 친구지간, 직장과 사적 모임의 모든 관계로 얽힌 인간들의 삶이 나를 비루하게 만든 지점이 어디냐에 따라 박박 문질러야 되는 얼룩이 생겨나지 않을까.
P85 '뇌를 속이는 거지... 가짜로 웃으면 행복한 줄 알고 좋아하는 거지. 뇌한테 농담을 하는 거야.'
그날부터였다. 진짜로 살고 싶어 속는 셈 치고 한 번씩 웃었다. 내일은 두 번, 글피는 세 번. 급속하게 번지는 웃음바이러스가 나를 장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소멸도 빨랐다. 나는 매일 웃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빙그레 입술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의 뇌는 내게 조금씩 속는다. 그리고 요즘은 나의 농담에 곧잘 반응한다. 아마 2년 전, 내 몸에 이상이 생기고 수술한 후부터 나는 그 이상한 법칙을 믿고 행동한 것 같다. 덜커덕, 인생의 크레바스에 빠졌다고 느낄 때 찾아가는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는 더욱 친절하다. 천 년 이상의 크레바스 시간을 견딘 지은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P115 '너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관계는 어디에도 없어. '
여전히 힘든 한 사람. 이해와 양보의 길이 이렇게 멀고 험한 줄 몰랐다. 나의 여유가 바닥이 날 때쯤 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다행히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고 상담가로 활동 중인 지인에게 SOS를 쳤다. 그녀의 공감과 이성적인 판단을 빌어 나는 거리 두기를 선택했다. 누군가는 내게 "거리 두기보다 수용을 선택하면 어때?"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쉬어야 하는 숨구멍이 먼저 필요했다. 성숙한 인격체가 되기 위해 나를 채찍질하는 것보다 우리의 다름을 인정하며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나를 먼저 지키는 것. 이미 답정너를 찾고 있던 내게 지은이 찾아왔다. 인플루언서 은별을 통해서.
P140 '쳇 베이커 <Autumn leaves>네? 오늘 같은 가을밤에 듣기 좋다.'
음악을 좋아하는 해인, 교통사고로 동시에 세상을 떠난 부모님, 그래서 할머니와 살았던, 몽땅 서른셋 인 재하와 연희의 동무 해인. 그가 선곡한 오늘의 재즈곡을 바로 듣는다. 흰색의 니트티를 입은 젊은 남자가 휴대폰 화면을 가득 메운다. 쳇 베이커, 그는 미국의 재즈 트럼펫 연주자이며 가수였다. 낭만과 우울을 넘나드는 연주, 막장 인생으로 더 유명한 전설적인 음악가를 오늘 알았다. 58년을 살다 간 그의 사생활이 어떠하든 여름밤에 듣는 그의 음악은 흥겹다. 나의 40대의 어느 날, 문인들과 함께 찾은 칵테일 바에서 들었을 법한 음악을, 식탁에 앉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듣는 한여름밤의 꿈같은 시간. 놓쳐 버린 <가락 스튜디오>의 댄스파티에 새삼 아쉬운 마음을 들이붓게 되는 음악. 7분이 촘촘하게 흐른다. 기억했다가 가을이 오면 파도 소리 들으며 밤이 새도록 듣고 또 들어야지. 마음이 너무 좋아 춤추다 무척 가을스러워질 때까지.
P162 '바다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사람들의 비밀을 가슴에 안고 파도로 소멸시킨다. 그래서 바다는 깊고, 깊다.'
재하의 엄마 연자는 신경숙의 <깊은 슬픔>에 나오는 우리들의 언니 혹은 어머니다. 공순이 연자가 사랑한 유부남 반장이 재하 아버지로 끝났을까.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연이 해변에 머문 찰나의 파도 같아도 실은 심연의 바다에서부터 시작된 길이라는 것을 연자는 알려 준다. 딸로, 맏이로, 엄마로 가난과 마주한 그녀의 삶이 바다를 더욱 푸르고 깊게 하였음을 인정하게 한다. 지나온 나의 삶, 나의 얼룩은 얼마나 푸르고 깊은 것이었을까. 바다는 나의 이야기를 어디메쯤 숨겨두고 어느 해변으로 끌고 가 끊임없이 소멸될 파도를 만들고 있을까.
P171'행복한 일은 천지에 널려 있어요.'
연자는 얼룩을 지우는 일을 사양한다. 그리고 떠올릴 때 마음이 덜 아프게 주름만 조금 다려 달라고 한다. 내가 찾던 행복이다. 천지에 널린 행복이다. 모든 행복과 불행은 새치와 흑치처럼 골고루 섞여 있어 뽑아낼라 치면 실수하기 쉽다. 연자는 말한다. 주름도 이쁜 것도 다 내 삶이라고. 대체로 삶 앞에 당당하게 맞선 사람이 하는 말은 신뢰와 위로와 용기를 싣고 타인에게 선물처럼 간다. 결국 이 문장의 도착지는 읽는 독자, 내 마음이다. 버릴 것 없는 나의 모든 것이 행복 그 자체다. 내가 '행복'이라고 발음하면 붉은 동백꽃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춤을 춘다는 것을 여기서 깨닫는다.
P181'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곁'
나이 들면서 깨닫게 되는 하나의 이치. 그럼에도 자꾸 그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늘 어긋나는 삶의 조각들. 그러나 어제에 연연하지 않고 오늘을 살면 된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다시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면 몸이 먼저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곁을 깨닫는다. 실수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요소다. 때때로 마음이 깊은 이를 만나 철없는 나를 여태 기다려주었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온다면, 그때부터 나는 그 빚을 갚기 위해 누군가를 참고 견뎌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P265 '어서 오세요. 여기는 마음사진관입니다.'
다시 부모를 만나는 지점이 마지막일 것이라 여겼다. 기대감으로 남은 페이지를 급히 넘겼다. 몇 장 남지 않자 나는 마음이 급했다. 어서 사건이 일어나고 클라이맥스가 나오고 극적인 재회가 일어기엔 남은 지면이 부족했다. 그러나 누구나 상상하는 뻔한 결말로 작가의 펜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지은은 늙기 시작했다. 세탁소 사장이 늙기 시작한 때는 지은의 슬픔이 사라지는 지점과 연결된다. 해인의 사진에 찍힌 '속눈썹에 맺힌 투명한 눈물'이야말로 갤러리에서 직면한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었을까.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과거. 어쩌면 해인은 세상의 모든 지은을 위한 전시회를 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도 창이 가장 큰 버스를 타고 가다가 '바다 갤러리 정거장'에서 내리면 해인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의 전시장에 우리의 눈물 한 방울도 투명하게 빛나고 있지 않을까. 문득 길을 잃었다 여겨질 때 나의 '마음 도서관'으로 오시라. 어쩌면 우리가 함께 그 길을 찾을 수도 있겠다.
이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웨스 웨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떠올랐다. 알프스 산자락 네벨스바드에 있는 핑크빛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처럼 인생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따뜻한 곳이다. 무더운 올여름, 여러 권의 가벼운 소설을 읽었다. 그곳에는 나의 지친 세포들을 위로하는 문장들이 가득해서 좋았다.
매미는 마지막 여름을 위해 뜨겁게 울면서 내게 시간을 알린다. 곧 가을이 올 것이다. 자오선의 핏빛이 줄어드는 시간, 미처 마르지 않은 내 마음의 얼룩으로 조바심 내지 않겠다. 가을의 바람 속에서도 선선히 지워질 얼룩과 주름과 냄새가 있을 것이다. 혹한의 그늘 어딘가에서 잠들어 버릴 아픔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거름 되어 봄날의 희망을 싹 틔우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여름이 오면 나는 마음이 가득한 도서관과 사진관과 세탁소를 찾으면 될 일이다. 소나기 세차게 내리는 어느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