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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Apr 20. 2023

4월의 숲

나를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 달 만에 다시 숲에 왔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유록의 순들이 자라 단단히 여문게 확연히 보인다. 햇살로 코팅한 잎들은 바람에 몸을 뒤척일 때마다 마치 맑은 수정처럼 반짝인다. 나의 폐를 관통하는 청량한 공기가 주는 상쾌함도 바로 저 잎들의 호흡 덕분일 게다. 하루가 다르게 점점 짙어갈 초록의 그러데이션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현실의 시공간을 초월한다. 신이 쥐고 있는 리모컨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을 관통한다. 마치 우리가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는 것처럼 말이다.그러나 신은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그리고 작년과 올해, 그리고 내년과 미래의 어느 한 시점까지도 능수능란하게 오간다.


3년째 함께하는 숲과의 조우, 해마다 만개한 벚꽃과 진달래가 발끝에서도 피어났던 시간을 올해는 어찌하다 놓쳐 버렸다. 그것은 다시 세상과 맞짱을 뜨느라 바빠졌다는 뜻이고, 예전처럼 여전히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다. 몸이 아플 때는 만사를 제쳐 두고 먼저 찾았던 숲이 아니었던가. 그 숲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하며 걷는 동안 인생의 여유와 한갓짐을 맛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숲이 주었던 힘으로 다시 세상 속으로 성큼 걸어갔고, 그 세상의 달콤한 맛에 다시 숲을 잊었다. 달고 짜고 맵고 새콤하기까지 한 자극의 끝을 향해 달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나는 도대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헉헉거리는 현실이 나를 옥죄고 있었다. 몸이 바쁘니 덩달아 마음도 바쁘기만 했다. 나는 다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비가 내리고 산천이 젖은 덕분에 나도 해갈의 시간을 맞았다. 봄비는 나의 마른 정신에 생기를 불어넣은 죽비였다. 나를 숲으로 부르는 하늘의 모스 부호였다. 투투 툭 투 투 투둑. 해야 할 일을 다 내려놓고 무작정 차에 올랐다. 10여 분이면 도착하는 숲. 입구에 차를 대고 등산화를 신었다. 달랑 슬링백 하나 매고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을. 울창해지려고 열심인 나무는 그새 초록이 하늘을 덮기 시작해 땅그늘도 제법 큼지막했다. 지난겨울에 가득했던 낙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연두와 초록의 새순들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열심히 자라고 있었다. 봄의 붓질은 온통 초록인 것 같지만 가까이 혹은 낮게 몸을 숙여 자세히 보면 보라와 노랑의 키 작은 꽃들이 초록만큼이나 가득 피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무심히 툭툭 덧칠한 듯 여기저기 숨어 있는 봄꽃들의 색은 또 왜 그렇게 예쁜지. 꽃들을 보고 있으면 저 꽃들이 수 놓인 원피스를 입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다. 작년에는 붉은 동백이 가득한 원피스와 샛노란 니트 카디건, 재작년엔 보라와 초록의 원피스를 사게 만들었던 봄날의 유혹도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나의 늦은 봄과 4월의 숲은 비로 시작하였다. 그 비로 한 뼘쯤 자란 초록의 잎에 다시 소복이 쌓인 수양버들의 하얀 눈을 지나 무릎까지 자란 청보리를 뽑아 삘릴리 보리피리 불며 허공을 수놓다 보면 4월의 봄은 금세 차고 넘친다. 그러고 보니 찔레순과 검붉은 오디를 실은 푸른달이 당도할 날도 머지않았다. 비 내린 4월의 숲은 내가 잊었던 3월을 껴안고 든든히 자라고 있었고 5월을 위해 더욱 열심히 빛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마른하늘을 올려다보며 모스 부호가 도착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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