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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Feb 19. 2023

봄비, 내리다

저녁을 먹고 동네 산책을 다녀온 남편이 봄비가 내린다 했다. 창을 열었더니 그새 그쳤는지 촉촉이 땅만 눈에 들어왔다. 안방 방충망까지 밀어내고 창을 열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찬 공기가 얼굴에 닿는다. 좋다, 이 느낌.


얼른 현관 창고에서 휴대용 의자와 간이 책상을 가져와 베란다에 펼쳤다. 잠옷 위에 롱패딩을 고 앉아 으니 어디 캠핑이라도 온 것 같다. 안방과 분리된 공간에서의 낯선 이 기분도 좋다. 멀리 가지 않아도 낭만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나만의 핫플레이스다.


봄비 내린 후 도시의 소리는 이미 소음이 아니다. 빗길에 미끄러지는 자동차 바퀴소리와 부르릉 털털거리며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와 이따금 울리는 경적 소리와 지나가는 기차의 칙칙폭폭 소리 모두가 낭만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시간을 건너간다. 비에 젖은 도시의 모든 풍경이 행복의 징검다리다. 그 외에도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밤을 밟고 차곡차곡 내게로 건너온다.


습기를 고 넘어오는 소리는 메마르지 않다.  이미 젖은 내 마음과 세상의 모든 소리가 연결되어 있음이다. 시야는 벌써 가벼워진 물방울들이 오천미터 상공을 향해 올라가느라,  흐릿하다. 안개 자욱한 풍경은 한 폭의 수묵 담채화다. 나는 베란다 창들에 몸을 기대고 기린처럼 목을 최대한 뽑아 누가 볼세라 모든 전등을 이미 다 끄고 입을 아주 크게 벌린다. 그리고 갓 태어난 2월의 말랑한 습기들을 허파에 거듭 가둔다. 잠시 후면 무거워진 내 몸속에서도 후드득, 봄비가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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