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ef Journey

by 글똥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일본을 지나 한국으로 태풍이 건너온다. 패트릭 스웨이즈가 나오는 <폭풍 속으로>의 바다가 생각난다. 문득 그런 바다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해 어느 바다에 가면 엄청난 파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트렁크에 준비한 가방을 넣는다. 일을 마치고 곧장 나는 바다로 갈 것이다. 지난번에 사 둔 컵라면과 생수가 아직 트렁크 안쪽에 넉넉하다.


함께할 친구에게 톡을 넣었다. 작년, 그녀는 남편과 이별했다. 암이었다. 진단받고 육개월 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그녀는,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이면 홀로 떠난다 했다. 밤마다 잠을 못 이룰 때는 무작정 길을 나선다 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출근하는 일이 벌써 일 년 째다. 그녀의 일상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이었다. 우연히 그녀의 차가 카페 마당에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새벽 5시, 숲으로 가는 길의 카페 앞에서 나는 그녀를 보았다. 가랑비가 내리는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차 안에서 그녀는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슬피 울며 앉아 있었던 자리에 결계가 쳐진 것처럼 나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아는 체할 수도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다 어깨의 흐느낌이 잦아질 때쯤 나는 숲으로 들어섰다.


말이 없다. 둘 다. 때로는 시시콜콜한 설명보다 침묵이 상대의 마음을 더 잘 읽어내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녀와 나는 그래서 더 가까워졌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직업은 늘 에너지가 부족하다. 그래서 침묵은 우리에게 충전의 시간이기도 하다. 아이들과 부대끼며 지친 몸을, 설명하느라 쉴 틈이 없었던 입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의 문장, 하나의 형용사, 하나의 풍경으로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녀와 나에게는 불시에 떠나는 짧은 여행이 바로 그것이다.


허공에서 나뭇잎들이 춤을 춘다. 땅 위의 웃자란 풀들도 사정없이 흔들린다. 아예 허리를 왕창 꺾고 바람에게 길을 내 주기도 한다. 조금씩 내리던 빗방울이 어느새 와이퍼로 감당이 안 될 만큼 쏟아져 내린다.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달린다. 그녀가 운전에 집중하는 동안, 나는 차창에 들러붙었다가 순식간에 흩어지는 빗방울을 본다. 미친 듯이 소란스럽게 돌아가는 세상처럼 빗방울들도 쉬지 않고 부서져 흘러내린다. 반복, 반복 그리고 반복. 지루하였으나 숨이 찼던 일상과 달리 바라보기만 해도 지겹지 않은 활발발한 자연의 움직임. 시원한 빗소리가 세상의 고단한 소리들을 모두 먹어버리는 시간. 내 안의 복잡한 모든 소리가 씻겨나가는 시간. 그녀도 마찬가지.


바닷가, 사람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비가 오면 더욱 특별해지는 나만의 바닷가. 해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데크까지 파도가 범람한다. 파고는 높고 그 소리는 웅장한데 마음은 고요의 바다 가운데 유유자적. 게으른 몇몇 캠핑카족들은 서둘러 짐을 싸 돌아가는 중이다. 어쩌면 우리처럼 저 파도를 보려고 느릿느릿 움직였을 수도 있다. 파도가 파도를 타고 해변으로 달려온다. 모래에 부서지고 다시 모래에 부서진다. 반복, 반복 또 반복되는 파도의 일은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좋다. 행복하고 기쁘고 황홀해서 눈물이 난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통로를 찾지 못한 찌꺼기들이 저 파도의 길을 따라 흘러간다. 심연의 어느 한 모퉁이에 가라앉아 다시는 오지 않을. 아니, 저 파도에 얹혀 어느 날 몰려올 때는 상처가 아닌 모습으로, 슬픔이 아닌 언어로. 낯선 파도 앞에서 나는 이미 짧은 여행의 마침표를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