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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Dec 14. 2023

모처럼, 산책

비가 온다. 8월의 늦깎이 갈증을 씻어내 줄 반가운 비다. 새벽 거리의 홍등들이 요염하게 빛난다. 촉촉하다는 말에는 아름답다와 눈부시다는 형용사가 감춰져 있다. 특히, 비 오는 새벽의 여름날에는 본말보다 형용사가 더 주인 행세를 한다. 내게 기꺼이 곁을 내주는 여름비의 시간 속으로 하염없이 들어가고 싶어 중산지로 향한다. 미명의 시간, 벌써부터 사람들이 빗 속을 걷고 있다. 우산도 없이 혹은 맨발로 산책 중인 그들 속에 합류한다. 바람이 그새 차다. 이 비를 끝으로 무더위는 이 곳을 떠나겠구나. 바람에 실려 먼 나라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여름이 되겠구나. 빗물이 스민 땅은 자박거린다. 발바닥의 공간을 채운다. 비와 모래가 발바닥을 적시며 참방참방 노래한다. 자연과의 소통은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든다.


기차도 신이 났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비를 뚫고 공중에 퍼진다. 쇳소리와 만난 빗물들이 춤을 춘다. 씩씩하고 기운 찬 기차들의 행진이 꽤 멀리 서 있는 나의 발 끝에 당도한다. 흐르는 물은 어쩌면 지구 끝까지 나의 진동을 전할 수도 있겠구나.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비,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비, 하염없이 내리는 비만 있어도 나는 행복할 수 있겠다. 촉촉한 감성으로 세상의 모든 부정을 감쌀 수 있겠다. 누군가의 너덜해진 삶이 행복해질 수 있겠다.


지금 하늘은 해를 가리고 온통 회색옷으로 갈아입었다. 세상이 온통 분위기에 물든다. 회색이 빛나는 어느 날. 나도 오늘은 하늘과 닮은 빛깔로 출근해야지. 모처럼, 그레이의 세상에 그레이의 여인이 되어. 온통, 세상이 비로 충만한 날은 그레이, 그레이, 그뤠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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