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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Aug 16. 2022

낙수에 기대어

늦잠을 잤다. 아파트 이중창은 가끔 내게 낭패스럽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새벽부터 폭우가 시작됐다며 이른 출근길의 지인이 사진을 여러 장 올렸다. 깊은 잠에 든 내가 확인한 시간은 아홉 시, 큰 비는 벌써 다녀가고 가랑비가 조금씩 내린다.


서둘러 커피를 내리고 삶은 달걀, 감자 두 알, 복숭아를 챙겼다. 장화 위에 한 두 방울씩 비가 떨어진다. 우산을 손에 들고 숲으로 들어선다. 여기저기 패인 길을 따라 졸졸졸 계곡을 만들어 흐르는 빗줄기, 그 속으로 첨벙 뛰어든다. 발끝에 전해지는 시원한 여름, 그것만으로도 나는 하다.


빗줄기가 더 가늘어지기 전에 당도해야 할 곳이 있다. 구계서원의 낙수, 그것을 마침내 보려니 내 마음이 바쁘다. 한옥의 기와는 새벽 비에 충분히 젖었을 터이고 더 이상 스밀 데 없는 지붕 위의 빗물은 곧장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바람을 타고 온 사선의 비는 댓돌 위에서 미끄러지기도 했겠지. 그 빗방울들의 멋진 행진과 유쾌한  행진곡이 속히 끝날까 봐 나는 늘 가던 오랜 길에서 서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쁜 걸음 속에도 눈에 들어오는 변화는 시시각각 놀랍다. 검게 물든 소나무 등걸엔 초록 담쟁이가 쑥쑥 자랐고 솔잎 끝에 달린 빗방울들은 맑고 투명하게 빛난다. 송강 정철시조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도도한 자태의 벽오동나무는 비에 젖어 은근히 고혹적이다. 게다가  비의 계절을 지나면 저곳은 꽃무릇이 온통 붉은 등을 켜고 새 가을을 맞이할 것이다. 이미 자연은 어김없이 땅 속의 생명들을 차곡차곡 땅 위로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내가 처음 숲을 찾았던 작년에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톡, 톡, 톡.

기와의 골을 타고 빗물이 낙하하는 소리. 마당의 모래를 튕기며 '한옥의 보조개'를 만드는 소리. 툇마루에 앉아 가져 온 커피를 마시고 감자 한 알을 먹는 동안 가늘어진 비는 금세 자취를 감춘다. 기약 없이 떠나간 그들의 여행을 배웅이라도 하듯 산비둘기 '꾸꾹 꾸우 꾹' 울어댄다.


그제야 나는 무성한 마당의 잡초를 바라본다. 쓰러질 듯 땅에 엎드려있던 그들이 며칠 반갑게 내린 비에 하마 내 무릎까지 닿겠다. 생명을 낳고 풀씨를 저만큼 자라게 한 것이 어디 비뿐이었을까마는 오늘은 공덕의 팔 할이 그들에게 있다에 방점 하나 찍고 싶다. 언제쯤 다시 오시려나. 물어도 대답없는 하늘은 벌써 말갛게 씻겨 언제 그랬냐는 듯 환히 빛나고, 나는 툇마루 기둥에 기대어 기약도 없이 멀어지는 구름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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