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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Jul 20. 2022

여름이 나를


모감주나무에 꽃들이 흐드러졌다. 나무 아래는 먼저 피었다 진 노란 주검들로 꽃길이 환하다. 곧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고 번개가 울 것이다. 그리고 장마가 시작되겠지.


올해는 비가 느리다. 모감주꽃들이 다 지고 벌써 연두색 열매가 조롱조롱 달렸다. 장마를 기다리며 한편에 세워 둔 장화를 다시 신발장에 넣었다. 무더운 날들이 이어지는 새벽, 나는 운동화를 신고 숲으로 간다. 개망초가 하얗게 들판을 수놓았다. 바람이 먼저 걸어간 화이트 카펫이 숲까지 이어진다. 숲의 입구에 들어선다. 갑자기 울어 젖히는 소리, 숲 속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개망초가 핀 이유를 여기까지 와 보면 안다.


초록의 무대는 싱그럽다. 바이올린의 고공행진은 매미의 짧은 날들을 위한 찬가다. 콘트라 베이스의 장엄함이 황소개구리의 이방인 생활을 위로한다. 비둘기는 첼로의 자리에서 짝을 찾느라 분주하다. 콘트라 베이스가 쉬는 동안 관악기들이  뻐꾹 댄다. 끊임없이 지저귀는 새들은 하이소프라노의 음역대에서 천국을 노래한다. 한 시간 반의 연주를 들으며 나는 걷는다. 걸으면서 그들을 본다. 각자의 자리에서 필요한 시절에 최선을 다해 연주하는 한여름의 소나타.  


날벌레들은 스테레오 사운드로 내 귓가를 스친다. 여름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그들의 연주다. 초록의 대공연장은 입장료도 없다. 단지 숲으로 한 걸음 들어서기만 하면 된다. 단 한 번도 같은 곡을 연주한 적 없지만 언제나 낯익은 선율이다. 그것은 분명 여름, 여름이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여름을 관통하는 모든 소리는 아름답다. 숲에 깃든 생명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을 때 나는 일어나 숲으로 간다. 그리고 자연의 바람과 그늘에 몸을 맡긴다. 비밀의 문이  앞에서 열리고 끝나지 않은 연주가 흘러나올 때 나는 여름 한가운데 어느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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