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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Oct 05. 2021

경이에 대하여

얼마 전부터 다니기 시작한 산책길이 있다. 대체로 흙길이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생태계가 걸을 때마다 눈을 즐겁게 한다. 계절마다, 아니 달마다 새롭게 피고 지는 풀꽃들의 이름을 검색하고 불러보는 것도 재미있다. 


어느 날, 그 길에서 지인 부부를 만났다. 경산에 사는 사람이라면, 웬만큼 나이 들어 하늘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나이라면, 밥벌이의 고단함에서 쉬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길 어딘가에서 만나게 된다. 자연에서의 만남은 왠지 민낯을 내밀고 인사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더 친근하고 더 반갑다.


오십이 되면서 늦은 봄과 여름의 모든 시간을 숲과 함께 했다. 이제 눈을 감고도 길을 읊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책갈피가 생겼다. 지인이 길을 걸으며 지었다는 이름, 무릎을 치며 더 정확하게 떠올리고 덩달아 웃음까지 짓게 되는 길의 이름. 내가 단지 길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면 그가 만든 이름들은 내게 경이로움이라는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덕분에 기억 속의 빈 집을 차곡차곡 채우며 나는 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숲길을 들어선다.


#미루나무 완행버스길

국민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길이다. 자갈투성이 신작로를 걸으며 집으로 가는 길, 지나가는 버스라도 있을라치면 매연과 흙먼지로 한동안 숨을 참아야 했던 길.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다 버스의 속도에 온몸이 한차례 휘어지곤 했던. 덩그마니  나무 아래 보따리 하나 들고 서 있으면 곧 버스가 덜컹거리며 올 것 같다.


#숨은지

보일 듯 말 듯 나무에 가려 지나치기 쉬운 곳, 작은 통나무 여럿을 엮어 만든 다리를 건너면 사람 소리에 놀란 개구리가 폴짝 물속으로 뛰어들기도 하고 오리들이 한꺼번에 푸드덕 날아오르기도 한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그래서 지나가다가 나도 깜짝 놀라고 이내 혼자 ㅎㅎ 웃어버리고 마는.


#쌍봉지

성주군 초전면 동포리 281번지 담장 너머 무논  한가운데에도 봉우리가 있었다. 누구는 사람 무덤이라 하고 또 누구는 이무기 무덤이라 했다. 좀 무섭긴 했지만 달래가 소복이 올라오는 봄이면 너나없이 올라가 호미질을 하던. 쌍봉지를 지날 때마다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고 나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호미 한 자루 들고 성큼 저 위로 오르고 싶어지는.


#포도지

왼쪽엔 작은 못, 오른쪽엔 포도밭. 밀짚모자를 쓰고 일하는 잘생긴 젊은 총각은 눈 씻고 봐도 없다. 상상 속의  밭주인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산책길 굽이굽이 꼭꼭 숨어 있다가 불현듯 환해지는 풍경 때문이다. 포도밭 너머 피어나는 벼꽃, 그 너머 낮은 산, 그리고 펼쳐진 푸른 도화지. 포도밭 주인은 얼마나 좋을까. 일하다 문득 고개 들면 푸른 하늘 원 없이 바라볼 수 있으니. 가끔 그 하늘, 새와 나비, 구름, 비를 품고 일곱 가지 색으로 빛나기까지 하니.


#버드나비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자란 버드나무가 햇살에 반짝이고 바람에 춤춘다. 사라락 소리가 지상에 내려와 귀를 간지럽히면 옷을 벗어 바닥에 펼치고 털썩 앉아 눈을 감는다. 초록의 버드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며 창공을 수놓을 때마다 내 마음도 한 뼘씩 부풀어 오른다. 버드나비지를 찾은 오리들은 알까. 버드나비들이 하늘 높은 곳에서 오래전부터 가을을 노래하있었다는 것을.


#소로길

프렌치 메리골드, 썸머 라일락, 꽃범의 꼬리, 둥근  유홍초 그리고 울릉국화에 델피니움까지. 무수히 핀 꽃길을 따라 걷다 보면 육각형 작은 집이 나온다. 하얀 그 집은 분명 이 꽃들의 관리인이 가끔 머무는 곳이리라. 이곳을 지날 때마다 친구와 나는 만 가지 상상을 펼치며 소로의 월든을 떠올린다. 숲 속의 오두막이라 명명한 이유. 마침 가까이에 작은 호수도 있고, 게다가 크지도 않은 집은 아담하고 소박하기까지.


#터덜터덜 돌 차는 길

두 시간을 걸어 숲을 빠져나오면 다시 신작로가 나온다. 돼지감자꽃이 해바라기처럼 피어 있는 뙤약볕 길이다. 완행버스가 금방 지나간 것 같은 길을 걷노라면 발끝에 돌멩이가 툭툭 차인다. 덥고 지루한 길이다. 그러나 누군가 붙여 준 산책로의 이름을 떠올리며 걷는다는 것, 그것은 의미를 부여함과 동시에 기억의 서랍을 열어 과거의 시절을 비집고 들어오므로 매우 특별하다. 경이라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춘수의 꽃이 된 나의 길,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된 것처럼  이 숲도 내게 그러하다. 지인이 붙여 준 이름과 앞으로 내가 더할 이름, 그리고 계절을 바꾸며 내 기억 속의 추억을 떠올려 줄 변화의 숲.  살아야 할 넉넉한 이유다.




*표지:경산수필 성은영 회원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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