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향으로는 절대 보지 않았을 영화, <7인의 사무라이>를 휴대폰으로 3일에 나눠 천천히 보았다. 하필 고장 난 텔레비전, 새로 주문하고 설치하고 영화를 보기엔 빠듯한 시간. 그래도 은근과 끈기로 뭉친 대한민국의 아줌마는 흑백의, 지겨운 영화를 마침내 끝까지 다 봤다.
#농부
보다 보니 익숙한, 나의 유년 시절의 풍경이 화면에 가득하다. 한국의 어느 시골, 72년 봄, 시골 농부의 딸로 태어나 못줄을 잡고 모를 심고 농약을 치는 아버지 뒤에서 줄을 들고 열심히 따라다녔던 아이. 열심히 살았으나 늘 가난을 면치 못했던 부모님의 삶이 일본의 어느 시골에서도 재연되고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영상이 흑백으로 재생될 때, 나는 잊고 있었던 그리움으로 가슴 한쪽이 먹먹해진다.
#사무라이
그뿐인가. 돈키호테를 복사해서 붙여놓은 것 같은 키쿠치요를 보고 있노라면 산 너머에 풍차가 돌아가고 있을 것 같고, 나무 위에 올라가 적진을 살피는 모습에서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이 떠오르기도 한다. 3시간을 훌쩍 넘는 시간 속에서 과장된 그의 역할은 약방의 감초가 분명하다. 흑백 화면과 지루한 사건의 전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사랑
모든 역사에 사랑은 필수다.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꽃피고 생명은 태어난다. 젊은 사무라이 가츠시요와 농부의 딸 시노의 사랑이 왠지 낯설지 않다. 윗동네 총각이 아랫동네 처녀를 만나러 밤마다 담을 넘던 모습이 떠오른다. 가끔 뻐꾸기도 울었고, 개구리도 울었다. 마루에서 또르르 소리를 내며 구르던 돌멩이 소리도 자주 들었다. 달밤의 능소화같이 예뻤던 막내 이모는 멋쟁이 이모부와 그렇게 결혼을 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7인의 사무라이>는 1954년 제작된 영화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1910년에 태어나 1998년에 사망했다. 키가 무려 182cm다. 큰 숫자에 즐거운 상상이 보태진다. 작품에는 도스토옙스키와 셰익스피어, 고리키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도 있다. <7인의 사무라이>를 보면서 잠시 생각했다. 라만차와 허클베리 핀을 알고 키쿠치요를 탄생시킨 건 아닐까.
#변방에 피는 꽃
농촌 마을을 약탈하는 산적 떼와 싸우는 사무라이를 보면 홍길동과 전봉준이 잠깐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아마도 민초들을 위해 불의와 맞서 싸운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변방에 피는 꽃은 언제나 무리 지어 핀다. 작고 여린 꽃들이 무리 지어 핀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하나가 지면 또 다른 하나가 옆을 지킨다. 바람에 눕는 풀들도 마찬가지다. 짓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강인함이 있다.
#촬영 기법
영화를 보면서 긴장하였던 장면이 있다. 도적 떼를 살피는 민초의 모습이다. 감독은 죽창과 돌담 사이에서 동정을 살피는 그의 등을 보여준다. 누군가 뒤에서 민초의 등을 공격할 것 같아 내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저 농부는 내부에는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앞만 바라보았을 것이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다. 전쟁에서 똘똘 뭉친 민초의 힘을 한 번 더 보여준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를 다 본 뒤 든 생각이다.
#내 안의 사무라이
내게도 <7인의 사무라이>가 필요하다. 더없이 평화롭고 행복한 나의 시절에 내부의 적들이 꿈틀꿈틀 나를 공격한다. 살과의 전쟁, 우울과의 전쟁, 욕망과의 전쟁, 물질과의 전쟁, 관계와의 전쟁…. 끝이 없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나는 책을 펼치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 내 안의 사무라이가 나를 지킬 수 있도록.
영화:1954년,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 출연:미후네 토시로우, 시무라 다카시, 츠시마 케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