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에 실려 온 여덟의 완전체. 우리를 인도한 것은 일상의 무게를 견딘 시간들의 합. 기꺼이 하루를 내어 아낌없이 여기까지 왔다. 가족도, 일도 우리들의 미학 앞에 후퇴하는 시간. 쏟아지는 햇살이 혀 끝에 감긴다. 흘릴세라 핥으며 걷는다. 갈잎이 노래하는 언덕에 두서없이 앉으면 저절로 열리는 심관*, 기쁨이 요동치더니 웃음꽃이 핀다. 일탈이 곧 아름다움임을, 함께함이 미학임을 깨닫는 숲, 이곳은 사유원이다.
최선의 삶을 사는 자에게 휴식은 꿀송이처럼 달다. 우리는 달콤한 숲의 입구, 치허문를 지나 윙윙거리거나 혹은 붕붕거리며 쉼으로 나아간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 후드득 떨어지는 잎들, 허공을 가르는 산새들의 지저귐이 쉼의 틈새를 메운다. 다가오는 모든 것을 품으며 시간을 걷는 우리, 숲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자꾸 가벼워지고 헐거워진다. 오감이 촤르륵 부채꼴로 펼쳐지더니 산들바람을 타고 연기처럼 흩어진다.
빨강의 미학, 우리는 그것을 단풍이라 부른다. 다섯 혹은 일곱의 뾰족 별이 길가에 잔뜩 붉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빛깔이 가지 끝에 살아 숨 쉰다. 잔뜩 물오른 빨간 잎들은 낙엽 되기를 주저하며 왈강달강 생명을 자랑한다.
갱년기로 감정 조절이 쉽지 않은 요즘, 시도 때도 없이 화르륵 끓어오르는 감정은 나의 참을 인을 무시로 산산조각 낸다. 50대가 가을이라면 나는 차라리 낙엽이 되고 싶다. 뒹굴며 바스락거리다 때가 되면 어느 날, 잎맥조차 흔적 없으니 얼마나 깔끔한가. 비나리길에서 만난 우리의 단풍은 그래도 아직은, 살아있는 것이 더 아름답지 않으냐고 무시로 몸을 떨며 내게 소리를 높인다. 잎들의 주파수에 마음 한 가닥 이어질 때쯤,
게르니카, 붉은 철의 절규 앞에 선다. 전쟁의 상흔이, 높은 곳에서 탈출을 기다리다 녹이 슬었다. 매달린 채 세월을 고스란히 맞은 알바로 시자의 게르니카는 벽을 타고 흐른 시간의 눈물과 더욱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지금, 보는 이의 중년을 관통한다. 철의 본질은 녹이 아니다. 녹은 본질을 점점 잃어버리는 것이다. 본질이 사라지는 것이다. 마침내 녹슬어 산화되어 쓸모없어지는 것이다. 그 과정의 중심을 아니 시작을 나는 보고 있다.
이미 알고도 갈 수밖에 없는 여정, 대체로 우리의 삶은 저 녹슨 게르니카 같지 않은가. 쇄락과 슬픔이 가득한 구조물 앞에서 우리가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민낯의 철은 우리 삶의 날것과 같아서 더욱 시선이 머문다. 돌아보면 숱한 페르소나의 삶도 결국은 날것이었다. 서로의 날것을 껴안으며 여기까지 온 우리들의 삶을 소요헌에서 만난다. 붉은 단풍을 지나 게르니카의 붉은 절규 앞에서 우리들의 미학이 비로소 완성된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말을 사유원을 거닐며 사유한다. 단풍과 녹슨 철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 오늘의 '붉은'을 우리의 새로운 낙관으로 돋을새김 한다.
심관* 마음이 흐르는 관. 작가가 만든 낱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