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차는 매달 있는데 왜 우리의 데이트는 가뭄에 콩 나듯 자주 없는 것이 의아했지만, 그래서 그런지 더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더구나 더 기대감이 컸던 이유는 우리 부부 둘 다 좋아하는 마블 영화 '이터널스'를 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와 같이 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우리 둘은 부랴부랴 챙겨서 조조영화로 예매한 영화관에 갔다.
평소에 내 사이즈보다 한치수 큰 맨투맨 티셔츠에 헐렁한 바지를 입기 좋아하는 나는 오래간만에 사이즈에 맞는 파인 색 니트와 아이보리 니트 조끼를 레이어드 해서 입고,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긴 검정치마를 입었다. 설명을 이렇게 늘어놓기는 했지만 사실 세련되거나 멋진 착장은 아니다. 이렇게 입고 동네 슈퍼마켓에 가서 장을 봐도 어색하지 않을 착장이지만, 우리 부부는 둘 다 편한 것을 추구하는 편이라 꾸미고 외출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새로운 기분을 치마를 입은 것으로 표현하고 싶을 뿐이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영화관은 한산했고, 백신을 맞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백신 상영관에 가서 편하게 영화를 시청했다. 2시간 35분이나 되는 긴 영화 상영 시간 동안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어서 내 심장은 너무 힘들었다. 새로운 스토리와 등장인물을 이해하고 파악하느라 집중하고 봤지만, 징그럽고 무서운 괴물을 같은 우주괴물과 싸우는장면에서는 나는 마스크로 눈을 가리고, 두 손으로는 귀를 막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런 자극적인 장면에 예민하고, 무서워하는데 나는 왜 마블 영화가 좋은지 모르겠다. 결론은 재미있게 영화를 보았다.
아침에 보기 시작한 영화가 끝나고 나니 거의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있었다. 주린 배를 잡고 옆에 있는 샤브샤브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샐러드와 채소를 좋아하는 남편과 다양한 음식을 조금씩 맛보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가기에 딱 맞는 식당이었다. 음식을 먹으며 영화에 대한 얘기를 했다. 영화를 보기 전 호불호가 갈리고, 좋지 않은 평에 대해서 들어왔지만, 우리 부부는 둘 다 영화에 긍정적인 편이다. 새로운 세계관을 소개하는 1편이기에, 앞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스토리와 특히 등장인물에 궁금증이 더해져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1편에 다 만족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무튼 그렇게 대화를 하다가 나는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가고 파괴하는 역할을 하는 우주신과 같은 존재 '아르솀'과 그 피조물이라 할 수 있는 '이터널스' 그리고 지구 '인간' 그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는 감정 기복이 여보님에 비해 심한 편이다. 무엇이든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와 다르게 기복이 없는 여보님과 비교를 하면 나는 상당히 심한 편인 것이다. 그래서 힘들 때는 많이 힘들어하고, 좋을 때는 많이 좋아하는 나는 그때마다 마음과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감정에 따라 변하는 나의 마음에 나조차도 힘들 때가 많다. 나는 집에서 혼자 집안일을 하거나 작업을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라 밖에 나가 활동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다. 날씨가 흐리거나 우중충하면 내 기분도 날씨 따라 우울하고 우중충했다. 날이 화창하면 내 몸과 마음도 화창해졌지만, 볕도 잘 들지 않는 집이라 집에 있는 시간 동안 그렇게 밝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7년을 살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집에 더 많이 있는 사람으로 7년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참 많이 우울하고, 슬프고, 힘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내가 왜 이러는지 생각을 해본 결론은 나는 집에만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깥에 나가 활동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인데, 그렇지 않은 환경에서 지내왔으니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집에 혼자 우울하게 있을 때면 온갖 생각의 그물을 깄고, 나만의 결론을 내리기도 하고, 그러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또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들을 하기도 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나는 나의 하나님과의 관계 맺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하나님과 엄청 끈끈한 관계인가... 그 정도는 아닌 거 같다. 여보님과의 대화 속에서 나는 하나님께 이중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인간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인간을 만든 것은 순전히 하나님 당신의 이기심 때문이 아닌가. 당신이 즐겁고 행복하려고.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부정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되는 것이 아닌가.
또 다른 마음은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과 관계 맺으며 새로운 삶으로 이끄시는 분이라는 점. 하나님은 사랑이고, 우리도 그 사랑과 그분과는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점.
나의 감정 기복에 따라 나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이랬다가 저랬다가 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차원의 존재가, 더 크고 더 지능적이고 더 우월한 존재가 인간을 사랑해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내용은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이야기이다. 나는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또 믿기에 그런 이야기가 익숙하지만, 뭔가 그런 플롯이 내제해 있는 것 같은 이터널스의 스토리는 익숙한 듯, 그런데 또 새롭게 느껴졌다. 이터널스가 만들어진 목적을 거부하고 사랑하는 인간을 위한 희생하는 것. 존재의 목적을 위반하는 행동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이유라서 더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예수님의 존재는 인간을 위한 희생제물로써 오셨지만, 이터널스의 경우는 반대의 이유로 왔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배제한 채 나는 나의 고통과 나의 힘듬에 더 집중하게 될 때면, 삶의 이유나 인간 존재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짧게 살다 죽는 인생, 뭐하러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인가. 아무런 의미 없이 이로움 없이 허무하게 살아갈 인생이라면 오래 사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나 같은 존재가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사실 100프로 맞는 내용은 아니라고 여겨지지만, 힘든 감정에 치우치다 보면 이런 생각에 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기 때문에 그럴 때 하나님에게 불만을 할 수 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쁜 것이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결국 그런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여보님은 항상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긍정적일 수 있을까 나로서는 우리 여보님이 신기할 뿐이었다. 한결같이 긍정적인 마인드와 결론을 내리는 사람. 그래서 나는 그런 여보님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하고 부럽기도 하고 또 그런 영향을 받고 싶기도 했다. 나의 부정적인 의견에 대해서 계속해서 낙관적인 반박을 시도했다. 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낸 것이라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예를 들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설명하면서. 그리고 절망이라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고, 내가 정직할 때 생겨나는 절망 뒤에는 희망이 존재하는 것이라면서. 여보님은 정직하게 힘든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 뒤에 오는 희망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감정 기복에 시달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소신을 굳게 해 나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대화 후에 그런 여보님이 부럽고 멋지다고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힘들어하는 나의 감정이나 마음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어려워하는 사람 같아서 늘 대화 후에는 뭔지 모를 아쉬움과 패배감이 들었다. 나의 의견에 반박하거나 고쳐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인지 몰라도, 어쩌면 힘든 상태를 알아주고 함께 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내가 가진 잘못된 생각을 고쳐서 내 마음 상태가 좋아지면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다 보니 그런 과정을 거치려면 상당한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오랜만에 영화 데이트도 하고,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 오가는 진지한 대화도 하고, 즐겁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는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이들 하원 시간에 맞춰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기에, 해야 할 일정들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매일 마주하고,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쉼과 편함을 포기하는 순간순간의 선택들의 연속성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에 나는 늘 실패하고 좌절한다. 또 세상에서 기대하는 역할이나 능력에 대해 비교적 열등하고 부족한 상태로 있는 나의 모습에서 나의 자존감은 낮아지곤 한다. 이렇게 실패하고 좌절이 진행되고 있는 나의 짧은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을까? 내 존재의 이유가 합당하다고 여겨질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겠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내가 살아도 된다고 여겨지는 것을 날마다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나와 다른 여보님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어린 시절을, 어떤 사람들을, 어떤 사건들을 마주하면서 살아온 것인지, 나는 왜 이런 생각들과 감정들로 힘들어하는 것인지, 왜 부정하고 싶은 것인지, 받아들이는 것이 왜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궁금할 뿐이지만, 결론은 지금보다 나은 내 모습이 되기 위해 나는 이렇게 발버둥 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을, 세상을 탓하지 않으면 내 존재가 부정되는 것 같은 나의 힘든 상태를 이제는 받아들이고, 그저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뿐이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래서 여유롭게 대처하고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 이터널스를 보면서, 여보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참으로 많은 생각과 감정들을 정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