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이 늘 어딘가 공허하게 들렸다. 우리는 입으로는 모든 노동이 소중하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떤 직업 앞에서는 존경을 배우고 어떤 직업 앞에서는 안도와 멸시를 동시에 배운다. 특히 몸을 쓰는 직업을 향한 시선은 오래전부터 차갑고도 뿌리 깊었다. 많은 아이들이 어린 시절 한 번쯤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다. 그 말은 겉으로는 훈계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사람의 직업을 실패의 표지로 만들고 노동의 가치를 사람의 높낮이로 바꾸어버리는 잔인한 문장이다. 나는 바로 그 문장들이, 한국 사회가 직업을 하나의 역할이 아니라 은밀한 서열처럼 받아들이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내가 해외 국제학교에서 지냈던 시간을 떠올릴 때 더욱 선명해진다. 그곳에서 나는 전혀 다른 공기를 만났다. 우리는 꼭 대학교를 가야 한다고 믿는 쪽에 가까웠고, 그들은 꼭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쪽에 가까웠다. 우리는 왜 그들이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 역시 왜 우리가 모두 같은 길로 향해야 한다고 믿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기술을 배우고, 몸을 쓰는 일을 하며, 충분한 수입과 존중을 얻는 삶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선택지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대학과 사무직과 전문직이 ‘더 나은 삶’의 거의 유일한 형태처럼 제시된다. 그 차이를 가까이서 보고 있자니, 내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오래도록 만들어온 믿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시선이 한국의 급속한 성장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짧은 시간 안에 가난을 벗어나야 했던 사회에서 교육은 가장 확실한 사다리였고, 대학은 개인의 선택이기보다 가족 전체의 희망이 되었다. 부모 세대에게 공부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더는 힘겨운 노동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생존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몸을 쓰는 직업은 하나의 소중한 노동이기보다, 벗어나야 했던 과거와 가난의 흔적처럼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국에서는 직업이 역할보다 체면이 되었고, 삶의 방식보다 계층의 언어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또 하나의 조용한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드라마다. 한국 드라마를 떠올려보면 중심에는 늘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 사업가 같은 직업들이 있다. 병원 이야기, 법정 이야기, 재벌 이야기, 권력과 전문직의 세계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물론 드라마는 극적인 갈등과 서사를 위해 그런 공간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반복되는 장면들이 결국 하나의 세계관을 만든다는 데 있다. 어린아이들이 자라면서 그런 드라마를 계속 본다면, 자연스럽게 저런 직업만이 멋지고 중요한 직업이라고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생명을 돌보는 의사나 정의를 다투는 법조인의 일이 물론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화면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특정 직업만 빛나는 방식으로 재현되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회를 떠받치는 수많은 직업은 점점 더 배경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아이들은 세상을 배울 때 이미 편중된 직업의 지도를 먼저 받아 들게 되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은 몸을 쓰는 직업을 은근히 낮게 여기면서도, 결국 그들이 지은 집에서 살고 그들이 만든 길을 걷고 그들이 설치한 전기와 수도를 사용하며 살아간다. 사회는 그 노동 없이는 단 하루도 유지될 수 없는데, 정작 그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한 존중을 건네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의 손으로 완성된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손의 가치를 너무 쉽게 잊는다. 그러니 직업의 귀천이라는 것은 일의 본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회가 오랫동안 만들어온 환상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일과 사회가 높게 평가하는 일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닌데도, 우리는 자꾸만 겉으로 빛나는 이름에만 가치를 몰아준다.
나는 그래서 한국 사회에 직업의 귀천이 존재하는 이유를, 일이 본래 다르기 때문이라기보다 우리가 오랫동안 다르게 바라보도록 배워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듣는 말, 대학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체면의 논리, 그리고 드라마와 미디어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특정 직업의 화려한 이미지까지, 이 모든 것이 겹치며 직업을 사람의 높낮이로 읽는 습관을 만들어낸다. 특히 아시아 사회에서 이런 경향이 더 짙게 남아 있는 것도, 가족의 기대와 사회적 비교, 안정에 대한 강박이 더 촘촘하게 개인의 삶을 감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걱정하게 된다. 지금의 아이들은 무엇을 보며 자라고 있을까. 무엇을 성공이라 부르고, 어떤 삶을 부끄러움이라고 배우고 있을까. 화면 속에서는 늘 비슷한 직업들만 주인공이 되고, 현실 속에서는 여전히 몸을 쓰는 노동이 공부 못한 사람의 마지막 선택처럼 말해진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세상을 넓게 보기보다, 이미 정해진 몇 개의 이름만을 선망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는 몇몇 직업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설계하고, 누군가는 치료하고, 누군가는 판단하고, 또 누군가는 직접 짓고 옮기고 고친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노동 위에 기대어 살아간다.
결국 직업에는 본래 귀천이 없고, 귀천을 만들어내는 것은 늘 사회의 시선뿐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이라 해도 결국 누군가의 손으로 지어진 집에서 살고, 누군가의 노동으로 유지되는 도시 안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직업을 보는 눈부터 다시 배워야 하지 않을까. 무엇이 더 높고 낮은 가를 묻기 전에, 무엇이 이 사회를 실제로 움직이고 있게 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한국 사회가 진짜 성숙해진다는 것은, 화려한 이름을 가진 직업만을 우러러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세상을 떠받치는 노동까지도 똑같이 존중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