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가 휜다, 미래가 선다'_선배와 함께 쓰는 새로운 밤의 기록
동물원 숙직은 단순한 야간 근무를 넘어, 잠든 생명들의 안전과 보금자리를 책임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입니다. 모든 동물의 안녕을 살피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대비하며, 이튿날 아침까지 평온을 유지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동반하죠. 이러한 숙직의 의미를 처음으로 체감했던 20년도 더 지난 그 밤, 저는 긴장으로 뻣뻣했던 제 모습을 가만히 돌이켜봅니다. 숙직 업무를 알려주시던 선배님 곁에서 마치 이등병처럼 바짝 얼어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막내 사육사에게 깐깐한 선임과 단둘이, 그것도 어둠이 내려앉은 동물원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작지 않은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언젠가 혼자 해내야 할 일이었기에, 눈에 불을 켜고 집중하며 배우려 애썼습니다.
퇴근 후 겨우 긴장의 끈을 놓는 대신, 밤까지 이어지는 경직된 시간을 보낸다는 건 신입사원에게는 절대 편치 않은 일이었을 터입니다. 어쩌면 그 시절의 제가 딱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에게 처음 숙직 업무를 가르쳐주시던 선배님은 칠흑같이 어두운 에버랜드 안, 동물원 곳곳을 순찰하며 숨겨진 괴담과 주변을 떠도는 귀신 이야기보따리를 한가득 풀어주셨습니다. 감사하게도 말입니다. 불 꺼진 놀이동산은 신기했고, 함께이기에 홀린 듯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아, 내가 덫에 걸렸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선배님 이야기는 그 후 1년간 제가 홀로 숙직을 설 때마다 순찰 코스를 등골 오싹한 '난이도 최상 유령의 집'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콩닥거리는 심장을 애써 다독이며 순찰하였으니, 솔직히 속으로 선배님을 원망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마 오래 사실 거예요….) 지금은 내 집 거실처럼 편안히 오가는 곳이 되었지만, 그때만 떠올리면 웃기면서도 슬프고, 또 억울하고… 아무튼 만감이 교차합니다.
물론, 그 선배님께서 숙직 근무자의 역할이나 책임에 대해 나 몰라라 하신 건 아니오니 오해는 없기를 바랍니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정석대로 임무를 알려주셨습니다. 더구나 어린 후배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내어주고 자신은 기꺼이 불편한 자리를 택하셨던 선배님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답니다. 이제 와 헤아려보니, 모든 것이 어려웠을 후배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던 따뜻하면서도 독특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결국, 저에게 '숙직'이란 무거운 책임감보다 편안하고 좋은 추억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을까, 가만히 되돌아보는 밤입니다.
그리고 오늘 밤, 저는 동물원의 막내 주키퍼와 함께 숙직을 섭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설렘에 마음이 들뜨네요. 어서 통닭 한 마리 배불리 먹이고 선배님에게 물려받은 등골 오싹한 '유령의 집' 코스를 선물해 주어야겠습니다. 후훗.
이 밤이, 각자의 마음속에 따뜻한 여운으로 남기를 소원합니다.
송영관 에버랜드 주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