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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환 Sep 08. 2021

[바다] 1. 떠나는 용기

<캐스트 어웨이> - 로버트 저메키스 영화


브런치의 문을 두드리고 나서 첫 발행글의 주제를 '바다'로 골라 보고자 했습니다. 일생 동안 편안함의 극치를 마주했던 적은 매번 바다를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서울 도시숲 구석탱이 한가운데에서 지내고 있노라면 고향 부산 앞바다를 바라볼 적이 종종 떠오르곤 합니다. 구경 인파가 많이 몰려 있지 않은 아침 시간의 송정 바닷가, 송정에서 이어지는 7번 국도 해안로는 매번 방문할 때마다 심심찮은 위로 그 이상을 줄 때가 많습니다. 편안하고 적막한 감정이 함께 서린 그곳 바다는 눈요기 감으로만 삼기에는 송구스러운 느낌이 없지 않아 있는데,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된 지금에서라도 그를 조용히 탐구하는 것이 줄곧 위안을 받기만 했던 일상에 대한 보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다. 그에 대한 감상들을 여러 곳에서 수집해 보면, 드넓고 웅장한 자태로 자주 묘사되곤 합니다. 고요함 뒤에 숨어있는 표효까지. 독자와 관객은 왜 바다를 다룬 서사에 매료되어 왔을까요. 끝없는 수평선과 망망대해로 펼쳐진 넓은 시야 속에서 근엄한 꾸짖음을 준비하고 있는 듯한 무게감은 거꾸로 인간의 무력함을 부각하면서, 우리들을 효과적으로 두려운 감정에 휩싸이게 만드는 연출이 가능합니다. 인간은 조선술이나 항해술과 같은 약은 수단으로 바다의 기상에 준할 대범함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난파선과 무인도에서의 처량한 홀로서기는 두려움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한계를 낱낱이 고합니다. 이로써 이야기를 읽는 이들은 나약한 모습에서 비롯되는 생존, 후회, 절망, 겸손 등 다양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바라건대, 나약함을 스스로 발견하는 지점에서 작품의 진가를 깨달을 수도 있을 텝니다.

[바다] 감상문 리스트
# <캐스트 어웨이 Cast Away> - 로버트 저메키스 영화
# <노킹 온 헤븐즈 도어 Knockin’ on Heaven’s Door> - 토머스 얀 영화
# <파이 이야기 Life of Pi> - 얀 마텔 소설



감독 │ 로버트 저메키스

출연 │ 톰 행크스, 헬렌 헌트

제작 연도  │ 2000 년


기다리는 것은 소망하는 바를 결국 이룰 수 있겠다는 희망고문에서 나온 가엾은 행위일 때가 있습니다.

긴 시간의 고역을 참아내면 바라던 무엇을 쟁취할 수 있을 거란 작은 자신감의 행위, 주저하지 않도록 메말라가는 몸을 반듯하게 일으키는 선택입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 Cast Away>는 과거 자신의 삶을 되찾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를 더욱 기다리며 4년 간 무인도 생활을 버텨 낸 격정의 인물을 이야기합니다. 영화는 명백한 생존 기행이며, 프레임 중심마다 극한의 외로움으로 둘러쌓인 공간에서 물러나지 않는 절박함과 용기를 담아 냅니다. 그러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기다림의 끝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곳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또 다른 용기가 필요하다고도 말합니다. 주인공 자신에게 필요한  용기가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때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기다림’의 무게감을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 주는 듯합니다. 주인공의 시련을 영화 처음부터 드러내면서 말이죠.

 



사랑하는 약혼녀 켈리를 잠시 떠나 말레이시아행 FedEx 화물기에 올라탄 척 놀랜드는 불의의 추락 사고로 인해 무인도에 불시착하게 됩니다.

그에게 남겨진 구호물품은 FedEx 고객들의 택배, 그리고 배구공 윌슨.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살아갈 방도마저 없는 척에게 다급한 생존 신고가 필요하지만, 시간은 무심하게도 4년 동안이나 그를 혼자 내버려 둡니다. 영화는 야위어 갈수록 탈출 시도에 더욱 견고해지는 척을 유심히 관조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그의 필사적인 행동들에 격려를 보태라 다독입니다. 척은, 밀물에 우연히 쓸려 온 알루미늄 문판을 돛으로 삼아 밧줄로 정교히 묶은 뗏목을 타고 오랜 섬 생활을 끝을 내고 사회로 복귀합니다.


그가 맞이한 새로운 시작은 뒤틀린 사랑의 끝이기도 합니다. 4년 전에는 자신의 약혼녀였던 켈리가 재혼한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척의 표정엔 놀랍게도 일그러진 구석은 없습니다. 켈리의 남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 앞에서 한 박자 느린 대답을 주며 당혹감을 애써 감추려는 순간의 시선이 대신 뚜렷합니다. 불을 피우려고 생고생을 했던 지난날이 무색하리만큼 속전속결의 일상으로 되돌아왔지만, 척에게는 거뭇거뭇한 허무감이 쌓입니다. 그에게 기다림이란 무엇이었을까요.


Chuck, Kelly had to let you go. She thought you were dead.
척, 켈리는 널 떠나보내야 했어. 너가 죽은 줄 알았으니까.


척이 오랫동안 염원했던 재회는 척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언뜻 그간의 기다림이 안타까워지는 폭우 속 키스신까지 허망한 상황을 부각하기까지 합니다. 다만, 영화는 대체로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고 무책임하게 바라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말미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용기에 화답하듯이, 무언의 가능성을 다시 제시하는 픽업트럭을 척 앞에 멈춰 세니다.


Where are you headed?
어디로 가세요?


Well, I was just about to figure that out.
이제 막 알아보려던 참이에요.


척에게는 두 가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무인도에서 살아남아야 할 용기,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할 용기. 4년 간 그가 풀어낼 숙제는 눈앞의 물리적 고립뿐만 아니라, 이후 어떤 곳에서든 경험할지도 모르는 정서적 고립까지 겸허히 받아들이는 법을 깨우치는 것이었죠. 바다는, 조금 나빴지만, 그러한 방법을 익힐 수 있도록 그를 가두고 기회를 던져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시공간적으로 멀어지게 함으로써 외따로 살아갈 용기의 심지를 태웠습니다. 스케이트 날로 충치를 뽑아내는 고통, 목을 매달고 싶은 갈망, 그리고 윌슨을 떠나보낸 파동까지 바다는 매서운 훈계로 다그쳤습니다. 특히, 윌슨을 보내야 했던 선택은 켈리와의 이별에 앞서 겪어야 했던 예행연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다가 그렇게 그를 연습에 몰두하게 했습니다. 이미 그를 고향으로 되돌려 보낼 심산이었고, 여러 차례의 시험으로 끌어들여 강인한 홀로서기를 배우도록 했습니다. 척에겐 훗날 상실의 아픔을 이겨 낼 양분과도 같았고 말이지요.


무인도에서와는 다르게 모든 게 속전속결인 일상 앞에서 척은 허무함을 느낀다. 기다림마저 그런 것일까 싶다.




배우 톰 행크스 또한 주인공 척만큼이나 몸집을 줄여야 했다고 합니다.

1년간 지방을 빼고 수염을 길렀다고 하니 배역을 위해 고군분투한 배우의 모습이 각별한 작품이겠습니다. 배우와 배역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서, 한 명은 좋은 작품을 위해, 다른 한 명은 무사귀환을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는 점은 작품 안팎으로 꽤 흥미로운 공통점입니다. 여기 그들의 기다림에서 목표를 위해 감내해야 할 고통보다, 그마저도 자신의 경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겸허를 보게 됩니다. 척은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좌절하는 모습이 아닌, 바뀐 현실을 인정하는 차분함을 자아냅니다. 새로운 갈림길에서 지도를 펴 듭니다. 길을 묻고, 대답을 구해냅니다. 떠난 것을 떠나보내지 못했다면, 그는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을 테죠. 톰 행크스의 남다른 인자한 이미지가 더해져, 척 놀랜드의 여정에는 결코 불편하거나 후회스러운 분위기마저 없습니다. 그를 따라 삶을 겸공히 영유하는 법을 짚어 보는 관객의 역할도 이 영화 중심에 자리 잡게 되는 이유입니다.


척 놀랜드는 물에 젖지 않은 한 소포만을 남겨 두고 모두 생존에 활용합니다. 마지막 소포를 끝까지 뜯지 않는다는 점은 영화를 대표할 만한 설정으로 평가받습니다. 마지막 소포는 꼭 살아서 수취인에게 전해 주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뜻하는데, 척과 함께 관객들을 연신 희망으로 이끄는 동시에 후반부까지 궁금증으로 스토리에 대한 애착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사실 그 소포 안에 태양열 에너지 통신 핸드폰이 들어 있었다며 척에겐 쉽지 않은 농담을 해댄 적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이 그렇다 하여 척이 쉽게 구출되었다면 관객으로서는 미안하지만 아쉬울 수밖에 없지요. 무거운 경험을 얻지 못한 채 조금은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갔을 테니 말입니다.


주인공은 남달라야 한다는 편견이라면, 척에게 사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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