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킹 온 헤븐스 도어> - 토머스 얀 영화
감독 | 토머스 얀
출연 | 틸 슈바이거, 얀 요제프 리퍼스
제작 연도 | 1997 년
사랑하던 이들이 죽을 때도 그들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도하듯이.
천국은 그렇게 염원의 대상으로 일컬어집니다. 육체를 떠나서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며, 속세에 대한 걱정은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 경계 너머입니다. 궁금하네요. 단순히 천국이 어떤 곳일지. 그런데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도 천국이란 희미한 영역이 궁금하기만 한 얕은 관심거리일까, 감히 물어 봅니다. 곧 있으면 머물러야 할 자리, 보다 다부진 계획을 세워야 할 현실로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일 출신 감독 토마스 얀이 그리는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Knockin’ on Heaven’s Door>에서는 어느 두 세기말적 작자들이 ‘천국 가면 무엇을 얘기할까.’에 대한 진솔한 답사를 보여 줍니다. 골수암 말기 환자 루디, 극심한 뇌종양 말기 환자 마틴 이 두 인간은 천국을 얘기하지만, 서로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곳에 가서 다른 영혼들에게 그간 살아온 인생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탐구를 시작하며, 그 표현의 중심엔 다름 아닌 ‘바다’가 있어야 함을 직시하게 됩니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가 바다를 경험할 수 있도록, 꼭 그 바다를 가지고서 천국의 문을 두드릴 수 있도록 간절히 소원합니다.
천국이라 하면 너무 한쪽의 종교만으로 치우친 단어일까요. 그럼 극락이나 파라다이스 같은 말로 대체해서 이 글을 읽어도 좋습니다. 사실 중요한 건 주인공들이 천국에 가느냐 마냐 문제가 아닌 그곳에서 꺼낼 ‘바다’라는 주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해서 못 들어 봤어?
그곳엔 별 다른 얘기 거리가 없어.
바다의 아름다움과 바다에서 바라본 석양을 얘기할 뿐이야.
물속으로 빠져 들기 전에 핏빛으로 변하는 커다란 공.
사람들은 자신이 느꼈던 그 강렬함과 세상을 돕는 바다의 냉기를 논하지.
영혼 속의 불길만이 영원한 거야.
주인공 루디(왼쪽)와 마틴(오른쪽). 행색이 좋진 않아 보여도 그들은 바다를 염원하고 있다.
삼면이 바다인 내 고향 나라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지만, 가만히 두고 보면 삼면이 육지인 독일에서는 꽤나 있을 법합니다. 바다는 그들에게 적절한 미지의 공간입니다.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대상이자 천국으로 가져갈 열쇠인 바다는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떠나기에 좋은 귀착점이 됩니다.
주인공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환자들이고, 인생의 끝자락을 다루는 눈물샘 자극용 플롯이라지만 사실 영화의 장르는 순전히 코미디입니다. 그들의 여정은 어느 정도 희화화되면서 바다를 향해 가는 시작점부터 말썽 그 자체죠. 아니, 범죄 영화랄까. 갱 두목에게 값진 벤츠 차량과 현금 백만 마르코(한화 7억 원 정도)를 전달해야 할 또 다른 두 남자, 행크와 압둘도 빼놓을 수 없는 요주의 콤비입니다. 이 둘은 우리의 시한부 환자들에게 보기 좋게 차량과 현금을 도난당하고 맙니다. 행크와 압둘에겐 발등에 불똥이 튄 격이나, 거꾸로 루디와 마틴에겐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의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 것. 서사의 시작이 이럴진대 웃지 않고 배길 순 없는 장르라는 점은 명백해진 셈입니다. 바다에 이를 때까지 환자인 척하는 이 도망자들은 이제부터 남의 돈과 차를 가지고서 직진 코스를 밟습니다. 아주 거리낌 없이.
그들이 밟는 여정은 대범합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절도와 위협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지역 경찰도 막을 수 없는 그들을 자꾸 괴롭히는 건, 아픈 몸입니다. 뇌종양 말기인 마틴에게는 느닷없이 발작 증세가 나타납니다. 그들에게 어떤 걱정거리가 없어질 즈음, 발작은 불청객처럼 그에게 찾아오곤 합니다. 일확천금의 일탈은 한순간 초라해지고 그들의 몰골은 걱정과 시련에 둘러싸인 채로 야위어 보이기만 합니다. 인질을 붙잡을 때, 절도 차량을 운전할 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어머니 앞에 설 때. 짜릿하던 여행길이 괜히 나빠질까 봐 보는 이들조차 조마조마해지는 건, 결국 아픈 환자라는 운명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곧 죽음을 앞둔 연약한 바보들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와닿게 됩니다.
아참, 곧 천국에 갈 사람들이지.
바다로 가고 있었지.
아픈 몸을 이끌고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두 사람의 얘기는 비단 관객뿐 아니라 영화 속 독일 시민들에게까지 생중계가 될 정도. 행크와 압둘 콤비도 현금과 차량을 훔쳐간 놈들이 누군지 알게 되고, 심지어 그들의 갱 두목에게도 소식은 금방 다다릅니다. 인생의 말로를 걷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예의였을까요. 보스로 등장하는 덩치 큰 남자가 현금과 차량을 절도한 죄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묻지 않습니다. 대신 그 덩치값은 루디와 마틴에게 있어 괜찮은 한마디의 무게가 됩니다. 갱 보스는 우리가 알던 이야기를 건넵니다.
천국에는 주제가 하나야.
‘바다’지.
노을이 질 때 불덩어리가 바다로 녹아드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지.
두 사람이 망망대해 저편을 바라보며 앉습니다. 두 사람은 바다를 바라보고, 바다는 두 사람을 품습니다. 어느새 한 사람은 다시 발작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끝내 일어서지 못합니다.
아마 제목과 같이 천국을 두드리는 장면으로 서사는 갈무리가 된 듯하네요. 바다가 딱 한 번 등장합니다. 인생을 한 번만 살 듯 말이죠. 그래서 마지막의 바다는 두 사람에게 경건한 대상입니다. 지금껏 마주해 본 적 없는 대상과 마지막을 함께한다는 이야기는 어딘가 서글픕니다. 바다와 좀 더 친해져 볼 시간도 많지 않습니다. 다만 동경의 대상을 만나는 유일무이한 기회는 그렇게 서글픈 만큼, 죽어가는 영혼에 강렬한 불꽃을 남깁니다. 인생의 마지막 지점을 가히 장관이라고 부를 수 있게끔 바다는 그들에게 붉은 노을을 던져 주기로 합니다. 마지막을 불태우라는 듯이, 강렬한 무언가라도 남기고 가야 할 인생이지 않겠느냐는 자상한 위로를 건네줍니다.
영화는 끝나가는 두 삶을 단조롭지 않은 의미로 덮어 주며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 의미를 세우는 주체는 단연 바다입니다. 가보지 않은 선망의 대상이던 바다는, 끝내 직접 마지막 위로를 만들어 주는 동료가 됩니다. 두 사람을 결코 비루하지 않은 길로 이끌어 주고, 죽음 앞에서 목적의식을 잃지 않게 한 안내자가 됩니다. 사실 이번 작품에서는 바다를 필자가 원하던 그림으로 그려 줍니다. 위압적인 파도와 끝없는 수평선에서 오는 무력감조차 들지 않는 그저 평온한 도착지로서의 바다를 추앙합니다. 그런 안정적인 모습의 바다를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없는 프레임 전환에도 불구하고 그저 즐겁고도 생생한 감상으로 영화를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동시에,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앞에 두고 무조건적으로 슬퍼져야만 하는 정직한 애도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차가운 송장이기 전에 뜨거운 영혼임을 더욱 강조하는 스토리라인은 애도가 아닌, 오히려 정열의 상징성을 부추깁니다. 그 행동거지가 현실성과 합법적 선을 벗어나버린 과장법은 작품의 큰 아쉬운 점이고요.
바다는 두 사람을 품는다. 한 명은 곧 쓰러질 것만 같다.
두 사람은 근사한 천국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다가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요. 바다를 딱 한 번 본 것 가지고 천국에서 좀 떠들어댔을까. 애잔한 여운도 남지만, 다소 철부지 콤비였던 만큼 천국에 잘 갔으면 그만이라는, 경원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유머러스한 캐릭터와 경건한 소재를 적절히 섞어 놓은 맹활약상 작품이란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