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나의 청춘... 어른이 되면서 깨달았을 때.
중2병이라는 것이 있죠.
사춘기와 별개의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지만 저는 왜 고2도, 초2도 아닌 중2에 그런 고비가 찾아오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물론 그 고비라는 것이 허세를 품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내 멋대로 살고 싶다 보니 하게 되는 돌출 행동들을 떠올려 보게 됩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과 대항하기도 합니다.
한 소녀가 있습니다. 이 소녀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불러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일탈을 부립니다. 사춘기가 된 이 소녀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요?
철길 근처 후진 동네에 사는 소녀. 그렇게 스스로를 얘기하는 소녀. 그녀의 이름은 '레이디 버드'입니다.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 촌동네는 분명 아닌데 이 곳이 딱히 맘에 들지 않는 소녀.
정신과 의사인 어머니는 아들이 다니던 학교에서의 불미스러운 소식을 듣고 자신의 딸을 이 동네의 가톨릭 고등학교에 입학시킵니다. 따분한 수업에 칼같이 모든 것을 감시하는 선생님과 교장 수녀님을 보고 있으면 답답해 미칠 지경입니다. 친한 친구인 줄리가 있고 대형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오빠와 그의 여친이 있으며 아버지의 고용상태는 불안한 상황입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을 수도 있는 소녀죠.
어쩌다가 가입한 연극부에서 만난 대니와 첫눈에 반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죠. 그리고 마치 버스에서 지하철로 환승하듯 밴드를 운영하고 있는 카일로 바꾸고 그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줄리를 버리고 부잣집 시크녀인 제나와 친구가 됩니다. 모든 게 완벽하고 행복할 것 같은 순간 모든 불행은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그레타 거윅이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 데뷔한 영화 '레이디 버드'(Lady Bird, 2018)는 어떻게 보면 새로운 영화는 아닙니다. 흔한 아이들의 방황을 다룬 그런 영화이죠.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도 역시 그레타 거윅인데 그는 틈틈이 많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은 아니더라도 직접 출연을 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성격이라던가 이야기가 반영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레타 거윅을 알린 영화 '프란시스 하'(Fances Ha, 2012)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방황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 역시 그녀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였지요.(심지어 이 영화도 새크라멘토에서 일부 촬영했고 그들의 부모님이 출연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는 많은 작품의 각본을 쓰면서 배우로서, 작가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는데 그런 그가 처음으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든 것이죠. 그레타 거윅은 이 작품에서도 자신의 고향인 새크라멘토의 사춘기 시절의 이야기를 영화에 녹여 내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 역을 맡은 배우가 우리 모두 궁금하던 차에 이 역할을 맡은 배우로 시얼샤 로넌이 선택되었지요. 아역 배우 시절의 내공을 가지고 있던 그는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 2014)에서 복점을 지닌 케이크 가게 아가씨로 등장하던 모습이나 '브루클린'(Brooklyn, 2015)의 방황하는 이민자의 모습을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많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의 작품 중에 그나마 제대로 본 것이 앞에 말씀드린 이 두 작품입니다.)
삐뚤어진 사춘기 소녀의 성장기는 앞에도 말씀드렸지만 흔한 영화이고 신선한 소재는 아닙니다.
최근에 봤던 인상적인 영화 중에서는 '지랄발광 17세'(The Edge of Seventeen, 2016)와 닮아있기도 하죠. 가족들과 안 맞고 세상을 삐뚤게 살고 있습니다. 근데 '레이디 버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죠. 자신의 이름에 별명에 가까운 이름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이 이름을 불러달라고 강조하죠. 그런데 묘하게 크리스틴이 독립을 하면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때 그는 자신의 시그니처와 같은 '레이디 버드'를 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어머니와는 수없이 싸웠고 심지어 차 창문을 열고 탈출을 하면서까지 어머니가 싫었고, 이 동네가 싫었던 그에게 화해를 하게 된 계기는 앞에 말했던 크리스틴이 독립을 하면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크리스틴의 아버지는 휴지통에서 가져온 엄마의 진심이 담긴 편지를 딸에게 몰래 보내오지요. 어머니를 (완전히는 아니지만) 이해했고 굳이 고집을 부려가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런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게 분명했고 나이가 들고 점점 자신이 그 입장이 되어보니 그들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감독인 그레타 거윅의 실제 경험담과 얼마나 싱크로율이 높은 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통해 그 진심이 저는 크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울고 질질 짜는 방식으로 강요를 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웃음과 공감코드를 소환하여 이야기를 엮어 나고 있는데 한 편의 시트콤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심지어 이건 한국 시트콤을 보는 느낌이 들었죠. 꼰대같이 가르치려는 남친과 수학시험 성적을 독특한 방식으로 조작하는 대목, 예수님의 몸이라고 말하는 성체떡을 프링글스처럼 먹는 줄리와 크리스틴, 우울증에 걸린 신부님의 모습 등등 일반적인 영화나 시트콤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죠.
저는 일생 중 절반의 나이를 살고 반환점을 돌고 있습니다.
어른이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과 대립했고 지금도 저는 여전히 부모님과 살짝 대립 중입니다. 하지만 과거처럼 그들의 세계를 이해 못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100%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분명 우리와 그들의 세대는 다르고 그들은 여전히 막힌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깐요. 하지만 우리가 나이가 먹으면서 어른들이 악당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습니다.
크리스틴이 '레이디 버드'란 이름을 (잠시일 수도 있지만)을 버린 것은 결국 자신의 바보 같은 삶에 자책하며 이불 킥을 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많은 크리스틴들이 지금도 후회하며 이불 킥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행복했던 20세기가 지나갔고 우울한 21세기가 왔습니다.
철이 들어야 되는데 철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던 우리는 철이 들게 되겠죠.
영화 속 크리스틴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