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늬가 있는 시(詩)

섞박지

by 보리

섞박지


묵은 감정을 벗어버리듯

무는 말없이 속살을 내어주고,

상처였는지,

그리움이었는지

젊은 날 사랑의 언어처럼

고춧가루는 언젠가 지나온 뜨거웠던 말이다.



바다의 눈물이 말라버린 소금

바다를 건너온 기억 안에

새우젓은

오랜 약속도 잊을 때쯤,

한때 뜨겁고, 때론 시린

마음을 버무린다



짠맛이 있어야

기억이 오래간다.

각자가 가진 삶의 무늬를

감추지도 못한 채

한 데 모여 조심스레

삶의 조각들을 내어놓는다.



항아리 안에서

시간은 숨을 고르고,

서둘지 않고

견디며, 묵히며,

기다림이 발효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서로의 결을 받아들이는 일.

비로소 함께 숨 쉬는 일.

우리가 살아낸 하루가,

곱게 익어간다.


섞박지 (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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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를 썰며 내 마음도 조각조각 나뉘는 기분이었다.

양념을 버무릴 때는 지난 시간의 상처와 온기가 손끝에 배어든다.

한때는 너무 뜨거워 뱉어버리고 싶었던 말들이,

이제는 곱게 익어갈 기다림 속에 녹아든다.


깊은 바다의 기억을 품은 젓갈의 짠내처럼, 그리움도 오래 묵혀야 제맛이 나나 보다.

섞이며 살아가는 삶, 누구 하나 진하게 물들지 않고선

조화란 얻을 수 없다는 걸, 항아리 속 재료들이 가르쳐준다.


지금 이 순간, 서로 다른 맛을 가진 재료들이 섞으며

내 안의 삶의 무늬들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알게 된다.

사는 건 결국, 서로 섞이며 곱게 익어가는 일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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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박지


옛 문헌에 섞박지가 나타난 것은 조선 중기의 문헌인 『산림경제』이지만, 현재와 같은 섞박지는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 볼 수 있다.

『규합총서』의 섞박지에 나타난 채소의 종류는 무·배추·가지·오이·동아·갓 등이고 고추 등의 갖은양념이 들어간다. 또 그전까지는 주로 소금에만 절였던 것을 조기젓·준치밴댕이젓·굴젓 등의 젓갈을 이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낙지·생복·소라 등의 해산물을 넣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섞박지는 주로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담그는 김치로서, 담그는 법은 다음과 같다. 배추를 다듬어서 5㎝ 정도로 잘라 소금에 절였다가 헹구어 건진다. 무도 배추와 비슷한 크기로 썰고, 미나리와 갓도 5㎝ 길이로 썰고, 파도 굵게 채 썬다. 마늘·생강은 각각 다진다.

먼저 배추와 무에 생강·마늘을 넣고 고춧가루로 버무린 다음, 실고추·젓국·파·미나리·갓을 넣고 함께 버무려 항아리에 꼭 눌러 담고 우거지를 덮어 시원하게 익힌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