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늬가 있는 시(詩)

막걸리 한잔

by 보리

막걸리 한잔



한잔만 마시려 했는데

석 잔이 되었다.



저녁에 마시는 막걸리 한잔이

건강에 좋다기에

한 병 샀는데

익숙지 않던 술이라

며칠째 까먹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다

막걸리병과 눈이 마주쳐

한잔 마셔보니

달다.



한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그만

석 잔이 되고 말았다.



취기가 올라오니

저절로

천상병 시인이 생각난다.



달 아래 술잔을 기울이며

폼 잡고 쓴 이태백 시보다

막걸리 한 병으로 하루를 살던

시인의 언어가

가슴에 콕콕 박힌다.



하늘로 돌아간 시인에게

건배를 청하며



‘배 든든하고 기분만 좋은 것’

그 한 줄에



맞네 맞아



혼잣말로 맞장구치며

바라본 세상이

차암

아름답다.







매일 새벽 산책을 할 때마다 천상병 시인이 생각난다.


“새벽빛 와닿으면”—

그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새벽빛 아래 서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풀잎 끝에 맺힌 이슬을 만나며 걷는 기쁨이

얼마나 벅찬 행복인지,

그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안다.


이슬같이 맑은 영혼을 지녔던 시인은


1949년 마산중학교 5학년 때, [죽순] 11집에 시 <공상> 외 1편이 추천으로 실리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던 천재시인으로 1952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재학 중 문예지에 <강물>, <갈매기> 등이 추천되어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다.


1967년, 정치적 목적의 간첩 조작 사건인 동백림 사건에

간첩으로 몰려 온갖 고문을 당했다.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자식을 가질 수 없게 되었고,

이가 다 빠져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정신질환까지 얻어 길거리를 떠돌게 되었다.


1971년,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었고,

그의 실종 소식에 친구들은 유고시집까지 펴냈다.


한 의사의 제보로 그의 생존이 알려졌고,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 여사가 수년간 간병하며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목 여사는 찻집 ‘귀천’을 열어 시인을 돌보았고,

1993년, 육신의 고통을 벗고 63세에 하늘로 돌아갔다.


그가 노래했던 “귀천(歸天)”이었다.


시인처럼 매일

이 세상 소풍 것처럼

아름답게 살다 가고 싶다.


https://www.yna.co.kr/view/AKR20220121117600797

[오늘은] '귀천' 천상병 시인 태어나다

- 이 기사에서 시인의 얼굴을 만나보세요 -






막걸리 - 천상병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막걸리를 마시면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옥수수로 만드는 막걸리는

영양분이 많다

그러니 어찌 술이랴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마시니 취한다는 걸 모른다

그저 배만 든든하고

기분만 좋은 것이다.




술 - 천상병


술 없이는 나의 생을 생각 못한다

이제 막걸리 왕대포집에서

한 잔 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젊은 날에는 취하게 마셨지만

오십이 된 지금에는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하다.


아내는 이 한 잔씩에도 불만이지만

마시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행복 - 천상병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평이 온단 말인가!





천상병 시인의 묘비명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막걸리시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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