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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란 Oct 10. 2017

사표[辭表]

직책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적은 문서

늦은 아침 잠에서 깨었다

전날 늦은 식사는 내 온몸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데에만 삼십 분 이상이 걸렸고, 몸 전체를 일으킬 생각을 하는 데에는 장장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간 오분을 여덟 번 넘게 세었고, 출근시간을 넘긴지는 이미 한참이었다.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아니 아무렇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의미 전달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어떠한 것도 나를 원래대로 돌려놓지는 못했다.

그리고 어떠한 것도 나를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집어 차가운 물을 목으로 넘겼다. 재빠르게 다가와 아침밥을 재촉하는 강아지.

그의 이름은 쭈쭈. 언제나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있고, 언제나 나보다 늦게 잠이 드는 존재.(사실은 한 번도 먼저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혹시 잠을 자지 않는 것일까..)

순간, 지각했다는 생각이 스쳐, 그것도 엄청나게 늦었다는 자각에 들이기 싫은 곳으로 발을 옮기듯 느릿하게 욕탕으로 향했다. 보일러의 목욕을 누르고, 수건 한 장을 들고 들어간 욕탕은 지나치게 어두웠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욕탕 문을 다시 나섰을 때, 그러니까 샤워를 마치고 물기를 털러 거울 앞에 섰을 때. 나는 내 얼굴이 어제보다 부어있는 것을 느꼈다. 라면은 역시 몸을 붓게 하는 가보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체중계를 바라봤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것에 올랐다. 74.. 아니 73.8 측정이 끝난 전자 체중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73.8kg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아마 오늘 아침 지각한 사실보다, 그 어떤 것들보다 가장 먼저, 처음으로 뭔가가 텅 빈 내 마음을 향해 던져진 순간이었다.


늦은 밤 라면 하나, 밥 한 공기 그리고 조금의 국. 이라지만 너무한 것 아닌가. 어제 나는 분명 71kg였는데..

믿을 수 없는 사실 하나를 알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쓰리다. 모든 게 버겁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그 온 마음을 다해, 머리의 물기를 말리고, 간단히 스킨케어 후 메이크 업을 마쳤다. 모든 치장을 마친 상태의 나는 그 누구보다 볼품없어 보였다. 생기 없는 두 눈과 핏기 없는 피부, 곧지 않은 자세와 어딘가 엄청나게 어두 워보이는 분위기. 아무래도 오늘은 그 누구도 마주치지 않는 것으로 세상을 향한 내 사랑을 주장해야겠다.


"ㅇㅇ네거리 ㅇㅇ협회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리는 듯 내 쪽을 바라보는 기사님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모르는 척 외면하고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초록색 나무, 칙칙한 색깔의 아스팔트, 오전 치고는 덥고 무거운 공기. 는 아무 느낌도 주지 못했다. 그저 여러 가지 잡생각이 들었다.


난 늘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 대부분의 목적지는 과거의 어느 시점들이었다.

중학교를 다닐 무렵, 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전 겨울방학, 스무 살의 여름, 스물넷의 크리스마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변한 것이 없다.

언제나 돌아가고 싶어 했고, 혼자인 채 마음 둘 곳 없었고, 그러면서도 늘 쉬지 않고 무언가를 꿈꾸었으며, 쉽사리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고, 그러한 현실조차도 잊게 해 줄 누군가들을 고대했으나, 언제나 내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들.

내 짧은 생은 그러한 장면들만 가득한 지루한 공상영화였고, 딱딱한 돌멩이 같은 그것은 깎일 듯 깎여나가지 않은 채 무수한 포기만을 만들어냈다.

수많은 그리움들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체 무엇을 아쉬워했던 걸까.

그저 그 어느 '때' 자체를 아쉬워했던 걸까... 그렇다면 왜...


생각이 거기까지 뻗쳐갈 무렵 차창밖으로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고

계산하고 내리려는데, 그 간 조용하던 기사님이 다시 나를 불러 세우고는 말했다.


"거 젊은 양반이 아침부터 너무 기운이 없구먼.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어요. 그러니 힘내시고. 잘 가요"


나는 예상치 못한 배려에 대답 대신 쓴웃음을 건넨 뒤, 그의 시야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오지랖을 피우는 걸까, 가끔씩.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이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내 세상은 이제 확실히 그 색을 잃고 말라가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치 지독한 고집하나를 꺾은 듯 한편으로는 속이 다 시원했다.


순수한 사람이 부러웠다.

감정표현에 솔직하고, 거리낌 없이 말하고, 또 넓은 아량으로 타인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한 사람들,

끝없는 열정으로 삶을 영위해가고, 예술을 사랑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래서 빠져들지만, 역시 또 금방 식어버리는 마음을 가진..

그래서 싫었다.

닮아가고 싶은 마음에 조금의 거리를 허락하면, 또 갑자기 너무 빠르게 너무 가까이에 다가와 있어 때론 놀라며 뒷걸음치던 때가.

무심한 척 배려해주는 마음 씀씀이가 좋아 곁에 두었더니, 사귀는 사이가 되어서도 계속 그렇게 무심하던 관계가.

결국 순수함이란 부러우면서도, 어리석은 것이었고, 그래서 너무 두려운 것이었다.


회사 앞을 도착했을 때 시계는 어느새 아홉 시 반을 가리켰고, 1시간 지각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미안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무엇이 이리도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수 백번 마음속에서 꺼내다 말았던 사표를 오늘은 낼 수 도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것은 내 마지막 죄책감이었으며, 양심의 표현이었고, 오랜 내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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