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가 남긴 이름의 기억과 나의 기록
20대 초반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해외 출장을 자주 다녔다. 국제 교류나 지원 사업을 위한 출장들이었지만 내가 주도하는 역할은 아니었다. 사업의 내용을 알리기보다 재원을 모으는 입장이었고 출장 기회가 많았던 건 대표의 철학 때문이었다. 직접 보고 듣고 느껴야 설득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주 일본에 갔다. 출장 뒤에는 며칠씩 개인 휴가를 붙여 쉴 수 있었고 그 배려 덕분에 일본에 오래 머무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면 온천 지역으로 이동해 호텔에 머물며 온천을 즐기곤 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어깨가 풀리고 생각이 정리됐다. 물속에 머리까지 잠기면 세상이 조용해졌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기에 나는 지금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떠올리면 온천이 먼저 생각난다.
센의 부모는 탐욕스러운 식사 끝에 돼지로 변하고 센은 이름을 빼앗긴 채 온천에서 일하게 된다. 그곳은 신들이 방문해 휴식을 취하고 오물신이나 가오나시 같은 존재들이 등장하는 공간이다. 영화 속 온천은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과 오염이 드러나는 장소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름’이라는 주제가 있다.
하쿠는 센에게 그녀의 진짜 이름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센은 하쿠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그를 자유롭게 만든다. 이름은 곧 정체성이다. 기억하고 지킨다는 건 나를 지키는 일이 된다. 그 시절 나는 온천에 몸을 담그며 내 이름을 되새겼다. 낯선 곳에서 흔들리던 나를 다시 붙잡는 시간이었다.
요즘은 해외 여행을 자주 가지 않는다. 20대에 충분히 다녔고 많이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대신 나는 지금 읽고 쓰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따뜻한 온천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내 이름 세 글자가 어떻게 쓰여야 할지 고민하고 기록한다. 몸을 움직이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지금 나는 뜨거운 온천이 아닌 차가운 공간 속에서 여전히 내 이름을 찾고 있다. 그렇게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