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사업하기
매년 11월부터 연말까지는 다음 해 경영계획을 짜느라 법인 담당자들은 밤을 새우며 똥을 싸댔다. 2007년부터 2011년 까지는 해외영업부서에서 일했다. 영업부서에서 제품별 월별 법인별 제품 수량을 정하고, 가격을 대입해 매출을 정하면, 생산부서에서 그 계획에 맞게 생산계획을 세우고, 구매부서에서 구매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마지막에 관리부서에서 손익을 계산한다. 결과가 좋을 리 없다. 영업부서에 새로운 목표치가 떨어지고 각 대륙별 담당부장님들은 각 법인별 담당자를 불러놓고 새로 받은 물량을 할당한다. 그렇게 몇 바퀴 돌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숫자가 나오고, 그 숫자를 받지 않으려는 법인 주재원과 다시는 볼 거 같지 않을 듯이 실랑이를 벌이고,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차 2차 3차 확판계획을 세우고 나면 다음 해 경영계획 세울 때가 또 찾아온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런 바보 같은 삽질을 매년 반복하는지를 말이다. 사업의 방향을 바꾸고 홀로서기 2년 차, 이상하게도 회사 계좌의 잔고가 줄어들고 있었다. 제품별 손익을 모두 관리하고 있는데, 왜 돈이 줄어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매달 들어가는 비용을 수익이 커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회사를 닫고 나는 다른 일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 멘토이자 친구인 L을 만나 넋두리를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L은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나자며, 문제를 정리해서 써보라고 한다. 자기는 들어도 답을 줄 순 없겠지만, 제삼자 시각이 도움이 될 거란다.
내게 쓰는 보고서
혼자 일을 하다 보니 보고서다운 보고서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고민하고, 생각하고, 분석했지만, 늘 머리로 일을 했다. 문제를 정리하고, 경쟁사 분석을 하고, PPT로 보고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글로 적어내니 문제가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보고서 첫 장에 판매현황을 만들어 넣었다. 채널별 제품별 월별 판매현황이 들어가니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제품을 얼마나 더 팔아야 손익분기점을 넘는지가 구체적으로 보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우선순위가 나왔다. 어설프지만 처음 나를 위한 보고서를 만들어 놓고 보니, 그냥 수도 없이 했던 그 삽질 경영 확판전략보고서였다.
L을 다시 만나 프레젠테이션하듯 정리한 것을 설명했다. 답은 명확했다. 사실 답은 이미 내가 알고 있었고, 나는 이미 수도 없이 그 답을 내는 연습을 해 왔던 것이다. 이제 정기적으로 내게 보고서를 쓰기로 했다. L은 고맙게도 보고서를 같이 받아보겠다고 한다. 세세하게 분석하고, 달성해야 하는 명확한 판매목표를 세운 그 달은, 우연이라기엔 너무 극적으로 목표를 초과 달성을 해버렸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삽질이에요 맨날! “
수원 사무실에서 서울 가는 마지막 셔틀을 놓치고 별 보며 선배에게 늘어놓던 불만. “이게 대체 뭐 하는 삽질이에요 맨날! “ “휴~ XX아 정말 지친다. 근데 어쩌겠니” 하던 그땐 대리였던 그 선배가 이제 부장이 되어 베를린으로 IFA 출장을 왔다. 그 선배를 보러 가는 기차 안에서, 삽질의 추억을 되새김질해본다. 한 삽 한 삽 사이에 숨어있던 의미도 함께.
2025년 경영계획을 세울 생각에 변태스럽게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