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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호 Apr 01. 2024

<가끔 내 일부가 여전히 거기서 사는 것 같아>

나: 그럼 그때 뭘 하면서 지내신 거예요?

선배: 그때는.. 잘 기억이 안 나. 그 2년이..     

 

그림을 그리러 시골로 갔다던 선배는 진지하면서도 수줍게 말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고 커피를 마셨다. 맞다. 너무 괴로운 시간은 기억에서 멀어지는 법이다. 행여나 기억이 날까 켜켜이 덮어두어야 하는 시간. 마냥 웃을 수만은 없던 건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 3학년을 앞두고 제주도로 떠났다. 떠났다기보다는 도망쳤다. 사는 게 창피해서 그랬다. 제주도는 내가 아는 가장 먼 곳.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뭘 할 거냐고 뭐가 되고 싶냐고 묻지 않는 곳. 겁이 없던 나는 짐이랄 것도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챙겨서 제주도로 향했고 허름한 모텔에서 달방 생활을 했다. 거기서 한 달간 지내면서 살 곳을 찾을 생각이었다. 모텔 옆에는 지붕이 돔으로 된 돔 나이트 클럽이 있었다. 사람들은 밤새 술 마시고 춤추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폈다. 왠지 나 혼자만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     

 

쫓기듯 제주도로 떠났지만 돈을 아끼려고 쿠키 앤 크림 맛 쉐이크 파우더를 챙겨 갔다. 하루 한 끼는 꼭 쉐이크를 먹었고 그게 물리면 김을 사다가 같이 먹기도 했다. 눈을 뜨면 밖에 나가 지역 신문을 가져와 그 좁은 방에 펼쳐 놓고 쿠키 앤 크림 맛 쉐이크를 먹으며 알바와 살 곳을 찾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거기서는 덜 창피했다. 모텔 1층에는 정수기와 제법 큰 어항이 있었는데 너무 외로울 때면 물고기를 본다는 핑계로 그 앞에서 꽤 서있다 오곤 했다. 그럼 카운터에 있는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주고는 했다.     


낮에는 버스를 타고 가까운 바다를 돌아다녔다. 돈이 무진장 없었기 때문에 바닷가에서 보말을 캐 먹으며 살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그때 제주도에는 개인 빵집이 꽤 많았는데 지금은 보기 힘든 러스크나 마늘 바게트, 안 팔리는 빵을 모아다가 만든 못난이빵, 버터크림 케이크들이 많았다. 나는 그런 빵집 구경을 좋아했다. 구경만 하고 그냥 나오기는 뭐해서 큰 슈퍼에 같이 붙어있는 빵집을 발견하면 맘 놓고 구경했었다. 그것도 싫증이 나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노는 걸 보며 시간을 보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계속 살고 싶었다. 가끔 시청 근처 술집에서 소주도 마셨다. 혼자 술을 마시는 내가 신기했던지 나보다 4~5살 많은 무리가 합석을 하자고 했고 우리는 그 후로도 종종 만났었다. 나는 눈치 없이 그 친구들의 우정 여행도 따라갔었다. 집에서 만든 된장이나 김치를 가져다주던 고마운 사람들.     


나는 달방 생활을 끝내고 제주대 근처 보증금과 월세가 저렴한 작은 원룸을 구했다. 보증금은 부모님께 부탁하는 대신 월세와 생활비는 어떻게든 마련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다행히 제주도를 내려오기 전에 몇 달간 떡집과 빵집에서 알바를 해두어서 얼마간 지낼 돈이 있었다. 엄마 아빠는 무슨 마음이었는지 허락해 주셨다. 분명 신문에서는 제주대에서 10분 거리라고 했는데 차로도 10분이 넘는 데다 산을 타야 해서 걸어서는 빠른 걸음으로도 40분이 넘게 걸렸다. 가릴 처지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가끔 제주대 학생인 척 컴퓨터실에 들어가 동생에게 이메일을 보내곤 했다. 동생은 당시 선덕여왕 드라마에 심취해 있어서 나에게 드라마 줄거리와 본인 생각하는 재밌는 포인트들을 빼곡히 적어서 보내곤 했었다. 나는 그럴 때면 동생이 보고 싶고 두고 온 게 미안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말 그대로 산이라 걷다가 풀을 뜯어 먹는 말이랑 마주치기 일쑤였다.      


나는 5일장 날을 특히 좋아했다. 술집에서 알게 된 친구들의 차를 얻어 타거나 버스를 타고 5일 시장에 갔다. 앵무새나 강아지 텃밭에서 바로 캐온 듯 모양이 제각각인 채소들, 그리고 사서 집에 가면 이미 부서져 있을 것 같은 장난감들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나는 으레 계란에 당근, 파 정도는 사서 돌아왔는데, 그럴 때면 꼭 부자가 된 기분이라 집까지 가는 40분 거리도 금방이었다.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며 졸업 준비를 하고 취업 자격증을 따느라 다들 바쁜데 나는 제주도에서 5일장 구경에 바다를 보러 다니는 게 부끄러웠다. 다시는 친구들과 예전처럼 지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놀고만 있는 게 죄스러워 알바를 찾던 중 새 주소 판을 붙이는 일을 하게 됐다. 한 집당 700원. 지도와 새 주소 판, 실리콘 접착제, 그리고 디지털카메라를 받았다. 지도에 맞게 판을 붙이고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면 700원을 받는 식이었다. 나는 달달이를 구해서 새 주소 판을 순서대로 넣고, 디지털카메라를 목에 걸고 지도와 형광펜을 챙겼다. 실리콘 접착제는 크기도 크고 무거운 데다 거추장스러워서 가방끈을 이어 붙여서 어깨에 메었다. 미리 준비한 밀짚모자를 까지 쓰면 준비 완료! 가끔 우리 집에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놀라서 뛰어나오는 분들이 있었는데 말주변이 없는 나는 설명을 하는 데 애를 먹었다. 새 주소 판은 붙여도 붙여도 끝이 없고 날은 더운 데다 목까지 말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도 한두 방을 떨어진다. 나는 그만 길거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순간 내 꼴이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싶었다. 그래도 힘내야지 다 붙이지 못하면 도로 이 무거운 끌고 산을 넘어야한다. 큰맘 먹고 짜장면집에 들어갔다. 대낮에 땀을 뻘뻘 흘리며 달달이에 실리콘 총에 밀짚모자까지 쓴 내 꼴을 보더니 사장님부터 점원 손님들까지 다들 놀라 쳐다보셨다. 나는 고개를 푸욱 숙이고 짜장면에 고춧가루를 팍팍 뿌려 맛있게 먹었다.       

 

버스를 타고 제주대학에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심심하고 또 지루하고 가끔은 무서웠다. 어쩌면 그 길이 너무 무서워서 내 미래가 무섭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유튜브도 없던 터라 볼 것은 나무밖에 없는 그 길을, 사람도 차도 없는 그 길을 40~ 50분 걷는 것이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그럴 때면 노래를 크게 불렀다. 온 힘을 다해서 부르고 중간중간 기합도 넣고 또 온 마음의 괴로움과 불안과 행복을 담아서 노래를 불렀다. 내가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큰 소리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봤다. 자유로웠다. 소리를 질러야지 견딜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누가 봐도 미친 여자였다. 갑자기 학교를 휴학하고 제주도에 가서 집을 구하고 실리콘 총을 메고 새 주소를 붙이다 술을 마시고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안나는 친구들을 사귀고 산에 올라 소리를 지르는 미친 여자.   

   

가끔 내 일부가 여전히 거기서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그렇게 지냈으면 어땠을까. 그때는 완전히 다 망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했을 것 같다.  누가 제주도에서 뭘 하고 지냈냐고 물어보면 나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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