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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호 Apr 21. 2024

<오늘 아침부로 그동안의 모든 벌이 끝났습니다>

최근 들어 몸이 좋지 않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얼굴과 손끝이 벌게졌다. 목뒤에는 혹 같은 멍울이 잡히고 무릎이 콕콕 쑤셨다. 긴 바늘로 무릎뼈 사이를 깊이 찌르는 것 같은 통증에 악 소리가 났다. 며칠 전부터는 자도 자도 잠이 왔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도,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하는 것도 온 힘을 다해야 겨우 할 수 있었다. 겁이 났다. 누워있으면 온몸이 따가웠고 나는 짜증이 났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꼴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 깊이 담아뒀던 그 말이 툭하고 튀어나왔다. "벌받아야 해" 맞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노가다가 하기 싫어 술을 마시고 밤새 누군가에게 잠꼬대로 욕설을 내뱉는 이유는 나였다. 술만 마시면 집안을 때려 부수는 아버지를 엄마가 떠날 수 없게 한 것은 나였다. 그들이 나에 대해 품은 기대와 기쁨을 끝내 저버리고 어디 가서 남들 다 하는 자식 자랑에 아무 말도 못 하는 건 바로 나 때문이다. 이 나이를 먹고도 이런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는 나는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벌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기회가 온다면 벌을 양동이에다가 한가득 담아서 내 온몸에 흠뻑 적실만큼 몇 번이고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어릴 적부터 누군가가 나에게 잘해주는 게 언제나 불편했다. 친구들이 편지나 생일 선물 같은 것을 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얼굴이 찡그려졌고 그런 나에게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은 종종 그게 무슨 표정이냐고 묻곤 했다. 누구라도 나에게 다정하게 대하면 어김없이 미안해졌다. 갚을 수 없는 빚을 지는 거 같아 마음이 괴로웠다.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으면 나는 되려 불안했다. 언제 싸우게 될까 언제쯤 도망가야 할까 그런 생각에 오히려 엄마 아빠가 빨리 싸워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커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날 떠날까 두려워할 바에는 차라리 그 사람이 빨리 떠나서 내가 혼자가 되는 게 낫다고 믿었다.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벌받을 일을 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처방받은 약 때문인지 나는 작은 일에도 눈물이 많이 났고 잠을 더 많이 잤다. 잠과 잠 사이 나는 가만히 누워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작은 로봇을 그렸다. 난 그런 게 정말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로봇이 마을마다 하나씩 있다면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로봇을 찾아갈 거다. 아마도 긴 줄이 생기겠지. 밖에 나가기 어려워하는 나 같은 사람도 사람들이 없는 새벽을 틈타 몇 번이나 로봇을 찾아갈 거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로봇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오늘 아침부로 그동안의 모든 벌이 끝났습니다" 일 것 같다. 그 말을 들으면 나는 그대로 로봇에게 몇 번이나 절을 하고 집에까지 무릎이 아픈 줄도 모르고 뛰어갈 것 같다. 마음이 가벼워지다 못해 내 몸이 공중에 뜨려는 걸 간신히 참고 날듯이 집으로 돌아가 새 인생을 살겠지.      


이런저런 상상 덕에 오늘 오후는 덜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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