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은 적은 나이일까. 나는 그때 사랑을 알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잘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쓰라린 현실을 끌어안고 사랑을 향해 돌진했던 그때를 나는 종종 떠올려본다. 그리고 참회한다. 그 친구도 나를 떠올려볼까. 떠올린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아있을까.
축구선수라는 타이틀은 그 잘생긴 외모와 꼭 어울렸다. 필드를 가를 때 넘실거리던 머리칼, 그 사이로 솟아오르던 땀, 기다란 종아리에 살짝 박힌 근육. 학교의 많은 학생들은 필드 위 그 아이의 모습을 각별히 여겼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면 그 발걸음은 사람들을 지나치고 가장 먼저 나를 향했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달콤한 증거였다.
그 아이는 나와 같은 여자 중학교의 학생이었다. 나는 열여섯에 여자친구가 있었다. 사회에서 동성애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자연스레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를 처음 본 사람들은 다정히 마주한 두 손을 보고 남녀 학생의 불장난이라 단정 짓곤 했다. 나의 여자친구는 그만큼 멋진 외모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꿈을 꾸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러운 극복이란 허망한 상상에 불과했다. 내가 속한 세상에는 우리의 관계를 의심하는 무리, 그 아이와 긴밀한 나를 시기하는 무리, 혜미는 그럴 리가 없다는 무리가 있었다. 그 어떤 부류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나는 어디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의 머릿속은 늘 그 아이와 자유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나의 세상은 결국 관계를 지켜내는 일만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 식구들이 나와 그 아이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삶과 연애에 대한 거짓말은 나의 내면을 하루하루 갉아먹었다. 떳떳하게 살고 싶었다. 사랑을 지키고 싶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 했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나를 무릎에 눕히고 동성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자 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렴풋이 스친 엄마의 눈가가 촉촉했다. 나는 그날 무너졌다.
“너 남자가 되고 싶을 때 없어?”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너의 성을 포기하라 말했다. 우리 어른이 되면 같이 돈을 모아 너의 성을 바꾸자 말했다. 그 아이는 알았다고 했다. 나를 많이 사랑한다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별은 약속처럼 찾아왔다. 여자친구는 다른 후배와 새로운 만남을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그 친구와의 관계를 매듭 짓기 직전, 우리는 교회를 찾았었다. 그 친구와 나는 두 다리에 힘을 꽉 쥐고 꿋꿋하게 버텨내고 싶었다. 하지만 냉담한 세상에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기도를 하고 싶었다. 기도 합시다, 라는 말이 떨어졌을 때 장난을 멈추고 손을 모으고 눈을 꾹 감았다. 나의 기도는 '마음껏 사랑하게 해주세요.'였다.
강렬한 세상의 중심에 서 있으면 가까이 있는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지나쳤던 장면들을 곱씹어본다. 그리고 이제는 알 것 같다. 그 친구는 본인이 사용할 브래지어를 꼼꼼하게 관리했고 몸에 좋다는 생리대도 신중하게 선택했다. 종종 남자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 아이의 얼굴은 바그레 했다. 머리 스타일이나 행동에 가려져 있었을 뿐, 그 오묘한 외모는 사실 사랑스럽고 예쁘장했었다. 그 친구는 여자로서 자신의 몸과 삶을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했다.
나는 그 이후로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자격. 자격의 문제라 여기게 되었다. 사회의 시선, 엄마의 눈물, 이런 것들에 맞서 숭고한 감정을 지켜내기에 나의 마음은 한없이 얄팍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를 부정하기에 이르렀었다. 나는 여자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 그래, 분명 마음을 다해 사랑했지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 한 번이면 충분하다.
나와는 달리 여자아이와 두 번째 연애를 시작했던 것을 보면 그 아이의 마음은 더욱 두터워졌던 것 같다. 어렸지만 용감했고 자신이 따라야 할 가치관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친구였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이렇게 회상하곤 한다. '나는 참 멋진 친구를 만났었구나. 나에겐 과분한 아이였구나.' 그런 아이의 삶을 나는 송두리째 바꾸려 했다. 그래서 나의 참회는 마땅하다.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하지만 찾아볼 수 없다.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
나는 남자를 사랑했던 걸까, 여자를 사랑했던 걸까. 오랫동안 이어온 이 고민과 참회를 이제는 그만두려 한다. 사랑에 조건이 필요한 나이가 되어 돌아보니 이 고민과 참회는 의미와 몫을 다한 것 같다. 그 친구와 단둘이 있을 때 나는 행복했다. 감정에 있어선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열여섯이라는 나이를 생각해본다. 온전하게 사랑을 할 줄 아는 나이였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다. 열여섯, 나의 사랑은 세상을 상대하는 용기였다. 사랑은 본디 사람 하나로 전부가 될 때에 가장 순수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그때 사랑을 가장 잘 알았던 것 같다.